[FF4/OC] 어느 용기사의 추락
FF1&듀뎀기반 커뮤 <묵시록의 밤>에 데려간
바론출신 용기사 자캐 과거로그 (>이 친구<)
다시 읽으니 FF4 2차창작으로도 읽혀서 여기 백업
조금 다른 시점에서 본 바론 용기사단 이야기
1
처음 만난 비룡은 밀밭에서 한참 떨어진 숲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옛 이야기들을 담은 책의 삽화에서도 용을 본 적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비룡은 생각보다 더 크고, 늙고, 한쪽 날개가 부러져 있었다.
도와줘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지? 쭈뼛거리던 레이몬드의 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따라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마침내 찾아낸 남자는 어른이었고, 갑주를 입은 기사였으며, 피바다 속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늘 가지고 다니라고 챙겨준 예비용 포션을 내밀자, 남자의 엄한 눈매가 누그러졌다. 그는 포션 병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섰다.
'...고맙군.'
'용에게 줄 포션이 집에 더 있을지도 몰라요.'
'어디지.'
'밀밭 너머요. 좀 오래 걸리는데, 금방 뛰어갔다 올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남자가 레이몬드를 한 손으로 안아들고, 무릎을 굽히나 싶더니 곧 날아올랐다. 그래, 날고 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발 밑에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고, 거센 바람이 얼굴에 부딪쳐오며 머리카락을 날렸다. 평생을 살아온 밀밭 위 하늘이 놀랄만치 높고 시원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들은 순식간에 집 앞에 도착했다. 남자가 레이몬드의 어머니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포션 몇 병을 더 받아 다시 숲으로 향하고, 비룡과 함께 다시 돌아온 후에야 그가 용기사단장 리차드 하이윈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농가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는 레이몬드도 '하이윈드'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대대로 명망 높은 용기사의 가문. 스러져가는 용기사단을 일으켜세운 전설적인 영웅. 근방에 하이윈드 가 저택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까마득한 상상 속 인물에 가까웠던 것이다. 근엄한 눈매, 누가 봐도 기사다운 당당한 풍채의 남자는 떠나기 전에 레이몬드를 보며 한 마디를 남겼다.
'너, 용기사가 되는 것에 관심 있나?'
그 한 마디가 레이몬드의 인생을 틀어놓았다.
레이몬드는 평민치고 제법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바론 서부에 넓게 펼쳐진 밀밭을 관리하는 농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을 배우고, 책을 쌓아놓고 읽을 수 있는 집은 또래 애들 사이에서도 그가 유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습기사가 되기 위한 창과 갑주를 준비하기 위해 그의 가족은 한 해 수확량의 반절에 맞먹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런 사소한 일엔 개의치 않아했다.
우리 집안에서 용기사가 나온다니!
어린 남동생은 매일같이 나무막대기를 들고 찾아와 용기사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떠나고 나면 한 해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겠지, 하는 마음에 레이몬드는 할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내어 동생과 놀아주었다. 괜시리 들뜨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한 달 후, 레이몬드는 리차드가 보낸 시종들을 따라 집을 떠나 바론 성으로 출발했다. 가슴이 몽글몽글했다. 용기사가 된다. 비룡을 다시 만나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다.
2
대부분의 용기사 지망생들이 열 살 이전에 훈련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열세 살의 레이몬드는 다소 늦은 편이었다. 그 해에 입단한 견습 기사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컸지만, 실력은 제일 형편없었다. 모든 것이 평범한 레이몬드가 그나마 내세울 것은 완력 정도였고, 용기사의 창술에서 중요한 것은 힘보다는 기술과 정확성이었다.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해 넘어진 것도 셀 수 없었고, 타고난 근골 때문인지 점프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체력만은 월등했기에 그는 동이 틀 때 일어나고 늦은 밤에 잠들며 남들보다 서너 시간씩 더 훈련했다. 매일같이 도약하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느라 생채기와 타박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겨우 견습 훈련을 따라갈 수 있었다.
리차드 하이윈드는 명성만큼 능력도 통솔력도 뛰어난 단장이었지만, 자비를 베풀어 용기사단에 받아준 평민의 아들에게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 주기엔 지나치게 바빴다. 그래도 레이몬드에게 스승을 단 한 명만 꼽으라면 주저없이 리차드를 꼽을 수 있었다. 그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주에 한 번 있는 단체 시범 훈련 때뿐이었고, 레이몬드는 일주일 내내 그 시간만을 기다리곤 했다. 더욱 열심히, 끈기있게 훈련해서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보여주리라. 그렇게 리차드의 인정을 받고, 뛰어난 용기사가 되어, 언젠가는 자신도 비룡을 타고 날 수 있으리라고. 그것이 헛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사 년이 걸렸다.
비룡을 타는 권한은 대대로 세습되어 왔다. 비룡의 개체 수는 극도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지능이 높고 인간과의 친화력이 뛰어난 존재였다. 주인이 죽으면 용도 시름시름 앓다가 따라 죽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주인 잃은 비룡은 옛 주인과 닮은 그 자식과 함께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만약 죽은 주인에게 자식이 없어 대가 끊기면, 남은 비룡은 최소 십오 년 이상 수련한 용기사들 중에서도 창술과 도약력, 용과의 소통능력이 가장 뛰어난 이가 인도받았다.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레이몬드가 그 안에 포함될 일은 없었다.
레이몬드가 열일곱에 정식으로 작위를 받기 전까지, 용기사단의 비룡들은 넷에서 셋으로, 둘로, 결국에는 한 마리로 줄었다. 레이몬드가 최초에 숲에서 구했던 리차드의 용이었다.
그는 종종 이른 새벽에 용 축사로 향해 자신이 영원히 타고 날지 못할 용을 만나러 가곤 했다. 견습기사는 들어갈 권한이 없어 축사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번번히 가로막히기 일쑤였지만,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좋았다. 잠자던 용이 새벽 어스름 속에 고개를 들고 축사 밖을 내다볼 때, 용과 시선이 마주하면 레이몬드는 그 신비로운 존재와 마음이 통했다는 착각에 가슴이 설렜다.
마침내 서임식을 거친 날 레이몬드는 곧장 용 축사로 향했다. 그는 이제 진짜 용기사였고, 더 이상 문앞에서 쫓겨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축사 앞에 도착하자, 안쪽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보다 최소 대여섯 살은 어려보이는 작은 금발의 소년이었다. 용기사가 아니면 용 축사에 출입할 수 없는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경비병도 딱히 아이를 제지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소년이 용과 무어라 조곤조곤 대화하는 것을 얼마간 더 바라보다, 레이몬드는 발걸음을 돌려 성 안으로 향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소년은 리차드 하이윈드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리차드의 아들은 그야말로 바론의 용기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윤기나는 창백한 금발, 귀족적으로 치켜올라간 눈매, 절도있는 몸가짐. 하이윈드의 성을 갖고 태어난 그는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왕실 예법에 익숙했고, 나이보다 한참은 어른스럽게 행동했으며, 바론 용기사 특유의 가볍고 유려한 창술을 타고난 듯 구사했다. 그 고귀하고 오만한 눈빛이 레이몬드에게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오로지 자신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이하의 것들에 눈길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단장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아들에게 제법 지극정성인 모양이었다. 매일 동이 틀 때마다 소년을 손수 훈련시켰고, 정식 훈련이 시작하기 전에 비룡의 등에 아들을 태우고 함께 날아본 적도 몇 번 된다고 했다.
질투는 들지 않았다. 질투란 감정도 어지간히 입장이 비슷해야 가질 수 있는 노릇이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이 완벽한 것은 당연한 세상사였으며, 그가 마땅히 누리는 것들은 농가에서 태어나 간신히 기사단에 들어온 자신이 감히 넘볼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오만한 금발 소년이 연무장에서 훈련하다 자신의 세 배는 족히 될 높이의 도약을 구사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한 가지 감정만이 엄습해왔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극도의 조바심이었다.
용기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높이를 알아야 한다.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리차드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도약보다 더욱 어렵고 위험한 것은 착지할 때의 충격을 흡수하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높이 날아올랐다가는 다리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스스로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원칙을 레이몬드가 어기게 된 것은 단순 토벌 임무에서였다. 그는 다른 용기사들과 함께 절벽 위로 도망쳐버린 마물을 쫓는 중이었다. 가파른 절벽은 그가 뛰어본 적 있는 높이보다 한참은 더 높았고, 도움닫기할 중간지대라곤 없었다. 동료 용기사들은 앞서서 절벽 위로 훌쩍 뛰어올라갔고, 레이몬드는 여느 때처럼 홀로 절벽을 빙 돌아 등반하는 대신 도약을 위해 다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그래, 언제까지고 뒤쳐질 순 없었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자신의 다리 힘은 이만한 높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껏 땅을 박차는 순간부터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찔한 감각이 뱃속에 엄습해왔을 때는 이미 고점이었다. 발을 딛어야 할 위치는 조금 위쪽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취했어야 할 착지자세가 휘청 무너지고, 몸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는 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중력이 어느 때보다도 매섭게 끌어당겼다. 어떻게든, 몸을 돌려야-
고통.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고, 입 안에 흙의 맛이 느껴졌다. 완결짓지 못한 생각들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어깨와 등허리가 멋대로 몸부림치고 있으니, 적어도 척추가 부러지진 않았구나. 그럼 무릎이다. 격통 이상으로 숨이 막히는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간신히 엎어진 고개를 돌려 허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무릎이 반대로 꺾여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줄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날 때부터 유달리 튼튼했던 몸은 그가 고통을 피해 기절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울고, 외치고, 도움을 청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마침내 점차 의식이 흐려질 즈음에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3
그는 회복도 빨랐다. 무릎 앞뒤로 흉측한 흉터가 남긴 했지만, 왕실 백마도사들의 극진한 치료를 일 주일쯤 받고 나자 일어나 걷고 뛸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매일 아침 꾸역꾸역 일어나 재활을 하고, 창을 쥐었다. 다만 도약력은 더욱 형편없어져 이제 간신히 용기사단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준이었다.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훈련에 나가기 전 레이몬드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지 않은지 몇 번 확인했다. 여기서 더 얕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제 몫으로 모아놓은 봉급을 탈탈 털어, 옛 용기사들이 비룡을 타고 싸우던 시절의 것처럼 묵직한 창을 하나 제작했다. 들고 점프하기에는 한참 무거웠지만, 공격을 버티고 힘으로 밀어붙이기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 이제 그는 무리한 도약을 시도하는 대신, 땅을 버티고 서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공격을 받았다. 완연한 성인의 태가 나는 몸은 놀랄 만큼 강인해졌고, 그의 완력은 이미 용기사단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그간 형편없었던 대련에서의 승률은 점점 나아지기 시작해 이제 자신보다 한참 높고 정확하게 뛰어오르는 용기사들을 상대로도 승리할 정도였다.
단장은 레이몬드 나름의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묵인했지만, 단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국왕은 이미 비룡 없는 용기사단을 대체할 비공정단을 키우기 시작했고, 아직 남아있는 용기사들은 옛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론은 마법을 천시하는 풍조였고, 그들은 창에 얼음마법 블리자라의 힘을 걸어놓았다는 것부터 받아들이지 못했다. 출신이 천해서, 근본이 없어서 그렇다는 비아냥들이 돌아왔다. 그럴수록 레이몬드는 더욱 더 비열해졌다. 대련 중에 다리를 걸거나, 창대를 손으로 붙잡아 방해하고 주먹질을 하거나, 눈에 흙을 뿌리는 건 예삿일이었다. 마물 퇴치 임무에서 창에 봄의 조각을 설치하고 즈 세 마리를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놓은 사건 이후로, 용기사들은 레이몬드를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귀족들 간의 정치 문제에는 무지했다. 리차드가 전투용 비공정 개발을 추진하는 개혁파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든가, 하는 소문은 들어본 적 있었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용하고 쉽게 버릴 수 있는, 뒷배 없는 평민인 자신이 선택되리라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에게 직접 접촉해 온 귀족은 그의 가족이 사는 집의 위치와, 레이몬드가 보낸 편지를 흔들며 어머니와 동생에게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고통을 가해 죽일 수 있는지 십 분 동안 떠들어댔다. 지난한 서론 끝에 그가 요구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리차드 하이윈드를 죽여라.
그는 몇 날 며칠을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망칠까? 그는 이미 감시당하고 있었다. 왕실에 고발할까? 실상 귀족이 평민 한둘 죽이는 것이 그리 큰 죄가 되지도 않는데 죽인다고 협박한 것이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달리 가족을 구해낼 방법이 없었다. 다른 용기사들만큼 기동력이 빠르지도 않은 그가 머나먼 집까지 향하는 시간보다 그들이 명령하는 시간이 더 빠를 것이다.
고민하는 새 눈물자국에 잉크가 번진, 겁에 질린 동생의 편지가 도착했다. 레이몬드는 더 버티지 못하고 귀족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귀족이 레이몬드에게 건넨 약은 무색무취였다. 평소에는 신체에 별 영향이 없지만, 몸에 상처가 있을 경우 독으로 작용해 그 상처를 빠르게 악화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액체라고 했다. 리차드는 어지간한 임무에서 부상을 입을 일이 없었지만, 레이몬드가 약을 받아오자마자 마치 설계한 것처럼 용기사단은 유달리 까다로운 마물 토벌 임무에 던져졌다.
일 주일 내내 이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나니 사망자는 없었지만 부상자가 속출했고, 리차드도 작은 부상을 입었다. 레이몬드는 비교적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중압감에 두어 번 구토했고, 단원들은 용기사가 비공정 멀미를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마음을 다잡은 날 그는 리차드의 저녁 잔에 귀족들이 준 약을 넣었다. 손수 들고 온 물잔을 건네며 내심 스승이 음모를 알아차려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손이 떨리고 심장이 달음박치는 것을 눈치채기를, 잔을 던져버리고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를. 단장의 입술이 열렸다.
'고맙군.'
오래 전 숲에서와 같은 말이었다. 리차드는 잔을 받아 쭉 들이켰다. 미소짓진 않았지만, 조금 풀어진 눈매만이 단장이 단원들에게 보이는 최대한의 상냥함이라는 것을 레이몬드는 알고 있었다.
다음날, 리차드는 부상이 악화되어 쓰러졌다. 다다음 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바론 성에 채 도착하지도 못하고 비공정 위에서.
매일 밤 비룡이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온 성에 울렸다. 주인을 그리워하던 용은 더 이상 날지 않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으며,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리차드의 아들은 매일같이 비룡을 간호했다. 그가 노쇠한 용의 얼굴에 코를 맞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면, 용은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며 작게 그릉대곤 했다. 한동안 침체되었던 용기사단은 단장을 애도하고 그 아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결집하며 조금씩 사기를 회복했다. 레이몬드는 그 사이에 끼지 못했다.
마침내 비룡이 그 주인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감은 날, 레이몬드는 성을 나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뒤돌아 드높은 첨탑들을 올려다보았다. 다시는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아니, 처음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숲에서 리차드가 자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닌 불운이었다. 금발 소년에게 단 하나 남은 보호자를 뺏은 것에 죄악감을 느꼈다. 아니야, 그는 하이윈드다. 아버지가 없대도 그의 삶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아직 서임식도 거치지 않은 그를 벌써부터 차기 용기사단장으로 추대하겠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고개를 저으며 레이몬드는 스승의 얼굴도, 소년의 얼굴도 지워버렸다. 그래, 분에 넘쳤던 것들은 전부 잊자. 나는 내 가족을 지켜냈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아가자. 아버지가 하셨던 농삿일을 이어받아 소박하게 지내면 돼.
스승의 목숨을 바치고 얻어낸 평화는 딱 두 달을 버텼다.
두 달 후, 그가 사는 마을에 역병이 돌았다. 어머니가 먼저 숨을 거뒀고, 그 다음은 동생이었다.
레이몬드는 꼬박 열흘을 앓고 회복했다. 의식을 차리고 나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미 상당한 부패가 진행된 시체 두 구를 땅에 묻는 일이었다.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전날 비가 와서 어찌어찌 땅을 팔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두 개의 봉분 앞에 주저앉아 그는 한참을 웃었다. 폐부에 공기가 남지 않아 숨이 턱 막혀올 때까지, 온 몸을 떨며 갈라진 웃음을 내보냈다.
일주일 후, 바론을 떠나며 레이몬드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