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FF/카인세실] 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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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3월에 낸 카인세실책 백업.

19금. 약간의 유혈 묘사, 고수위 성적 묘사 있음.

 

세실 파트 - 세실짖음이님 / 카인 파트 - 듄

 

 

 

 

 

 


 

 

유독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날이었다.


코스모스의 성역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만들어낸 넓은 습지는 끝을 모르고 내리는 비로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누군가 ‘멜몬드’라 부른 습지는 성역에서 내려다본 것과 달리 끝이 없어보였고, 세실은 질척한 늪을 헤치고 전진하다 동료들의 어설픈 모사품에 쫓겨 물러나기를 반복하며 낯선 세계에 대한 힘겨운 적응을 이어가고 있었다. 늪을 벗어나는 일도, 그렇다고 다시 성역으로 돌아가는 것도 요원해 보였다.


지친 성기사에게 달려든 이미테이션의 뒤통수를 카인 하이윈드가 으스러트리며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진흙 속에 처박혀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빗줄기 사이로 한참이나 이어지던 습지가 지평선을 경계로 끊기고, 풀잎 위로 하얗게 얼어붙던 서리가 마침내 눈이 되어 쌓일 때쯤에서야 세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지나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빗물로 번들거리는 용기사의 투구와, 푹 젖어 평소의 부피감을 잃어버린 새하얀 머리 위에도 급격하게 몰려온 냉기가 희끗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눈앞에 두고도 믿기질 않아. 고작 몇 걸음 차이로 이렇게 다른 풍경이 되다니….”


세실은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질적인 장소들이 눈앞에서 섞여드는 기묘한 풍경을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이 발을 디딘 땅이 오로지 전사들의 투쟁을 위한 경기장이며, 그저 어딘가 먼 곳에서 떨어져 나온 낯선 풍경들을 어설프게 이어놓은 조악한 모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했다.


"있잖아, 카인. 우리가 살던 고향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었을까?”


세실은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벗에게 자꾸만 말을 붙였다. 머릿속 풍경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얼음 조각에 대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떠오르지 않는 것이 그 뿐은 아니었다.


사실, 세실은 제 고향에 대한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성의 이름을 알았으나 그 모습에 대한 기억을 거의 잃어버렸고, 바론의 암흑기사를 자칭하는 자신이 그 칭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의 힘을 동시에 지닌 이유도 알지 못했다. 붉은 날개의 대장 세실 하비, 그리고 그의 가장 오랜 벗이자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용기사단장 카인 하이윈드. 가장 단편적인 기억 몇 조각은 그 사이의 무수한 공백을 더욱 의식하게 할 뿐,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붕 떠버린 기분을 느끼게 했다. 조화의 신 코스모스와 혼돈의 신 카오스, 두 신들의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모방세계에서 오직 이름과 검 하나만을 가진 채 눈을 뜬 이후, 천천히 머릿속에 돌아오는 기억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다른 세계에서 온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세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카인은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동료의 존재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모방세계에서조차 그는 세실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을 숨기는 데에도 보다 노련했다. 꽤 오랜 기간 은근한 노력에도 좀처럼 말을 나눌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기에 세실은 그의 오래된 벗이 제게 향한 의혹과 불안을 해소해주리라는 기대를 거의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와중,  모조품들로 가득한 세계의 유일한 '진짜' 용기사가 나타난 것은 가히 작은 기적이라 봐도 무방한 일일 터였다. 더군다나 카인은 이전처럼 곤경에 처한 동료를 구하자마자 훌쩍 떠나는 대신 늪을 다 건너도록 여전히 벗의 곁에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카인의 침묵뿐이었다.


“…조금, 춥지 않아?”


젖은 몸을 통째로 얼어붙게 할 듯 스며오는 한기에, 세실은 몸을 떨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두 손에 숨을 불어 녹이며 그는 곁을 지키고 선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눈높이에서 살짝 더 높은 곳에 있는, 보랏빛 투구에 반쯤 가린 그의 뺨도 추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잠시 쉬어갈 곳을 좀 찾자. 불에 몸이라도 말려야겠어."


'그간 하고 싶었던 얘기도 많고.' 세실은 자신의 속내를 굳이 말끝에 덧붙이지 않았다. 문득, 지금이야말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세실의 머릿속을 채웠다. 발걸음이 다시 이어지는 동안, 머릿속에 미처 꺼내지 못했던 질문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말라죽은 풀과 침엽수가 하얗게 파묻힌 벌판에, 검게 늘어진 흙발자국들이 금세 쌓여오는 눈에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 * *


무엇이 진실인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카인은 골베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달의 기슭에서 그를 조롱하듯 나타난 옛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세계의 진실을 털어놓고 사라졌다. 반복되는 윤회. 이길 수 없는 싸움. 영원히 계속되는 신들의 전쟁. 마도사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데 능한 자였다. 카인은 그 모든 말들이 거짓이고 함정일 가능성을 잊지 않았다. 다만 그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어째서 자신이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고향의 기억들이 세실에겐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벗은 침묵을 견딜 수 없는 모양인지, 고향에 대한 물음들로 예민해진 신경줄을 끊임없이 건드렸다. 카인은 대부분의 질문을 글쎄, 그랬던가, 잘 모르겠군, 따위의 짧은 답으로 흘러 넘겼다. 그는 세실의 얼마 안 되는 기억에 남아있는 믿음직스러운 아군을 구태여 연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를 완전히 밀어낼 만한 결단력도 없었기에, 카인은 벗을 다시 만난 순간부터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유지해 왔다. 싸울수록 기억이 돌아오는 세계에서 세실의 기억의 부재는 잠깐의 유예에 불과했다.


찬 공기 속에 숨을 내쉴 때마다 눈앞이 희뿌옇게 물들었다. 시야 가장자리에 세실이 몸을 떠는 모습이 들어왔다. 드러난 목덜미와 팔의 맨살까지는 감싸주지 못하는 성기사의 갑주가 눈을 맞아 평소보다도 창백하게 반짝였다.


"조금 무리하게 이동했지."


짧게 동의의 의사를 표하며, 카인은 세실을 따라 가던 길에서 발걸음을 조금 돌렸다.


눈발이 점점 더 거세져갔다. 카인은 단순히 눈을 피할 만한 지형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동굴이나, 큰 나무 밑이나,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절벽 기슭과 같은 곳. 그러나 눈보라를 뚫고 저 멀리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의심할 수 없이 마을의 불빛이었다.


"세실, 저걸 봐."


바람소리를 뚫고 카인은 등 뒤의 벗에게 반쯤 소리쳐 외쳤다. 세실이 무어라고 긍정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바론의 두 기사는 너나할 것 없이 눈밭과 나무들을 지나치며 불빛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성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대부분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야영해야 했다. 누구의 세계에서 기인하였을지 알 수 없었으나 설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은 기대하지 못한 사치였다. 얼마간 더 걸은 끝에 그들은 마을 기슭에 발을 들여놓았다.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누군가가 살았던 듯 마을 초입에서부터 생활감이 느껴졌다. 집들 사이를 구석구석 뒤져 적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적당한 오두막 하나에 발을 들여놓았다.


세실을 오두막 안의 가장 따뜻한 구석으로 밀어 넣고, 카인은 땔감을 찾으러 집 밖으로 나왔다. 뒤뜰에서 적당한 크기로 잘린 나무토막들을 발견하고, 손에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오두막 안으로 되돌아와 벽난로에 몇 개를 던져 넣고 불을 지피기까지, 카인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골베자가 남긴 말 중 그 어느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진실은 하나였다. 만약 이 땅을 장악한 모조 전사들에게 쓰러진다면 다음 전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진정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 예정된 패배는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절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인?"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움찔 뒤돌았다. 얼굴색이 조금 돌아온 세실이 손 안에 낡은 담요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방에서 이걸 찾아냈어. 집안이 따뜻해질 때까지 덮고 있자."


세실이 담요 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밀었고, 카인은 무심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구체화하기를 미뤄온 계획이 머릿속에 가물거리며 서서히 형태를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는 시선을 도로 올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얼굴에 드러난 동요는 투구가 숨겨주었지만, 벗을 상대하며 뻔뻔스레 평정을 유지할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웃으며 호의를 받아들여야 할까, 혹은 세실의 몸을 걱정하는 연기를 해야 할까? 결국 멜몬드 습지에서부터 유지해 온 애매모호함을 한 번 더 택한 채, 그는 담요를 내민 손을 무시하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 식량이 될 만한 것을 찾아봐야겠어."

 



* * *

 



담요를 든 손이 친우의 등 뒤에서 어색하게 허공에 머물렀다. 몸의 모양새가 드러나는 얇은 보랏빛 갑주 위에도 옅게 내렸던 서리가 벽난로에서 막 피워 올린 불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것을 보며, 세실의 입가에 띄웠던 미소가 천천히 지워졌다.


"너도 젖었잖아. 몸을 좀 말리고 함께 나가도 늦지 않아."


미래를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주변을 맴돌고 있을지 모르는 적의 존재나 당장 허기를 때울 식량의 여부 따위는, 어느새 문가에 손을 짚은 카인이 또다시 자신과 함께 있는 자리를 피하려 한다는 사실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을 채웠던 질문들이 새하얗게 날려간 자리에, 조급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급한 만류에도 얼어붙은 밖으로 향하는 벗의 발걸음에는 한 치 망설임이 없었기에, 세실은 그를 멈춰 세우기 위해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아니면, 아직도 내가 더 기다려야 해?"


우뚝 멈춰선 채, 그러나 카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찬바람이 활짝 열린 현관 너머로 맹렬히 들이닥쳤으나, 문고리를 쥔 손이 새하얗게 질린 것은 단지 그 때문은 아닐 터였다. 냉랭한 정적은 끊임없이 쌓여가는 지붕 위의 눈만큼이나 무거웠다. 세실은 여전히 담요를 내민 손길을 거두지 않은 채, 그가 기억하는 먼 과거에서 너무나도 무정하게 변해버린 친우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답하기를 기다렸다.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들려온 말은 그뿐이었다.


"…알고, 있잖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세실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방안에 피어오르던 열기가 모조리 사라진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카인은 그 스스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자신이 무엇에 그토록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고, 세실은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많은 질문들이 향하는 곳을 정확히 피해 여기까지 이르게 할 수 있었을까? 세실은 그 순간 피어오른 의심이 줄곧 제 안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카인이, 어쩌면 필사적일만치 피해온 답변에, 그 유예의 이면에 넘실거리는 불안을 세실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의 벗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바로 그 모습대로, 세실은 벗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뒤통수를 뚫고 제 시선이 투구 아래의 눈길과 마주하기라도 할 것처럼.


"카인, 나를 봐."


그는 줄곧 제 벗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무지 승리를 점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어느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으로 나타난 고향의 친우를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자신은 물론 카인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함을 알았기에, 그의 벗이 입을 닫았을 때 세실 역시 침묵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카인은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에도 끝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등을 돌리려는 것 같았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던 흔적이 벌써 파묻힌 눈밭 위로 다시금 발자국이 찍히는 순간, 이대로 눈 속으로 사라진 벗이 이번에야말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했단 말인가?


세실은 이를 드러낸 채 이젠 가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뒷모습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를 보라고 했어!"


그는 마침내 매 순간 눈으로만 쫓았던 친우의 왼쪽 손목을 사납게 붙잡아 돌려세웠다. 눈에 젖은 발자국이 찍힌 현관 바닥 위로 그들의 몸을 데워주었어야 했을 담요가 엉망으로 풀어헤쳐진 채 떨어져 내렸다.


"언제까지 내가 모른 채로 있길 바라는 거야? 나, 골베자, 그리고 너!"
"…세실."


이쪽을 향하는 듯싶었던 카인의 시선이 그대로 세실을 지나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깊게 눌러쓴 투구로 표정을 감춘 채 흔들림 없는 낮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고, 그 교묘한 평온함이 고삐를 놓친 분노를 되레 채찍질했다. 세실은 결국 보이지 않는 보랏빛 두 눈 대신 그 위를 덮은 용의 대가리를 노려보며 언성을 점점 높여나갔다.


"네가 보기에는 온전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야. 세실 하비야. 그래서 줄곧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어. 너를 믿으니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친구일 거라고, 내가 너를 신뢰한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무언가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삼키려 말을 멈추었다. 몰아쉬는 숨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메스꺼운 감정들이 머릿속을 채워 제대로 말을 고를 수조차 없었다. 숨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지만 세실은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의 친우를 붙잡아 세우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두려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네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어. 골베자, 그 자가 네게 말해준 것은 무엇이었는지도.


네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들, 그걸 내가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인이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실은 끝내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경련하는 입술을 이로 짓이기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 번 말이 되어 흘러나온 감정들은 쉬이 가라앉지 않은 채 목 아래에서 까맣게 타들어갔다.


"나는… 나는 아직도 널 믿어. 하지만 너 혼자서 모든 것들을 다 짊어질 순 없어."


목소리가 잦아든 자리에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바로 전까지 머릿속을 달군 열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게 식어버린 뒤, 세실은 그제야 차라리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후회했다. 석상처럼 굳은 친우의 팔을 붙잡은 손만이 마지막 미련처럼 여전히 떨어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카인, 제발. 나를 믿어줘."



* * *



바깥을 등진 몸에 찬바람이 세차게 부딪쳐오며 갑주 속으로 냉기가 파고들었다. 세실의 마지막 말이 흩어지며 거센 바람소리에 묻혀들었지만 아무도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인은 팔을 붙잡은 손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갈수록 쌓여가는 세실의 불안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었다. 낯선 세계에서 처음 세실을 만나고, 달 표면에서 재회하고, 그 후 세실과 마주하는 자리를 매번 교묘하게 빗겨나다가, 마침내 멜몬드에 다다르기까지. 카인은 벗이 시시각각 키워가는 불안과 조바심을 충분히 짐작했고, 그럼에도 선고를 미루듯 그것들을 외면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끓어오르는 불안을 숨긴 채, 카인은 세실이 옛 기억을 어디까지 떠올려냈는지를 다급하게 가늠했다. 카인과 골베자의 연결고리를 추측해낸 것이 단순히 그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딱딱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래, 무엇부터 듣고 싶지? 바론의 자랑스러운 붉은 날개가 무저항의 마도사들을 상대로 얼마나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는지, 그런 것을 알고 싶나?"


세실의 눈이 커지며 숨을 들이켰다. 그의 미간이 충격에 일그러지기 시작했지만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혹은 같은 왕명을 받들어, 마을 하나를 불태울 마물을 전달했던 때가 궁금한가 보지. 오래간만에 우리 둘이 함께한, 참으로 명예로운 임무였지. 우리의 적들이 얼마나 빠르게 스러져갔는지."


두 친우가 제각기 손을 더럽히는 사이 바론은 크리스탈을 순조롭게 모아갔다. 세실이 마침내 왕명에 거역할 결단을 내렸을 때는 그들 뒤로 죄 없는 마을이 몇 개나 불탄 후였다. 그러나 카인이 제 어둠에 사로잡혀 추락한 사이 세실은 너무나도 쉽게 그 피투성이의 길에서 빠져나가 성스러운 힘을 손에 넣었다. 오래 묵은 분노가, 흉한 질투심이 불씨처럼 피어올라 머릿속을 채웠다. 카인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일을 그르쳤는지, 그런 것을 듣고 싶은가. 믿음이라, 네게 기억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카인은 갑작스럽게 말을 멈췄다. 단도처럼 벗을 후벼 파던 목소리가 갑자기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늦든 빠르든 세실은 결국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가 벗이라고 믿는 자에게 공격당하고 턱밑에 날붙이가 들이밀어졌던 순간을, 암흑기사의 갑주를 뚫고 그 밑의 피부를 찢어놓았던 창의 감촉을.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배신했고, 너를 버렸어.


기억이 온전할 적에도 세실은 늘 그를 믿는다고 이야기했다. 한 번, 두 번 배반당하고서도 어떻게 그토록 절대적인 신뢰를 말할 수 있는지 카인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차라리 원망을 받고 질책당하는 쪽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으나, 마침내 그 신뢰가 무너져 내렸을 때 버려질 것이 두려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놓길 주저하는 비겁함이 있었다. 손목을 붙들어온 손에 힘이 빠지고, 카인은 그 온기를 더 견딜 수 없어 팔을 뿌리쳤다. 세실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이제 와서 다 지나간 과거의 기억 몇 가지를 떠올려낸다 한들 결국 세실은 윤회에 대해서도, 그의 벗과 형제가 세운 계획에 대해서도 마지막까지 모를 것이다. 같은 세계에서 불려온 세 명 중 오직 세실만이 유일하게 구원받아 마땅한 자였으며, 진실을 숨기는 것은 자격 없는 둘의 몫이었다. 이곳에서도, 이곳에서조차, 세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었다. 세실이 한 발짝 다가오자 카인은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끝끝내 거부당하고서도 벗은 애달프게 입을 열었다.


"카인, 나는-"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 어차피 때가 되면 전부 알아서 돌아올 테니, 네게 주어진 유예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어때."


마지막으로 선을 그으며 카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오두막 문을 열고 눈보라치는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발을 감싼 갑주에도 불구하고 냉기가 느껴지는 눈 덮인 땅을 딛을 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세실은 따라오지 않았다. 갑주를 뚫고 구석구석 부딪쳐오는 얼음장 같은 바람에 노출된 후에서야 가슴이 힘겹게 들썩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격양되었던 머릿속이 조금씩 식으며 무거운 납덩이가 뱃속에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카인은 자신이 또 한 번 일을 그르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생겨난 의심의 불씨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세실이 벗을 다시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눈 속에 고립되어 나갈 수 없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버릇처럼 찾아오는 죄책감을 한 구석으로 억누른 채, 차가워진 머리로 카인은 오늘 밤 계획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행할 방법을 생각했다. 한때 골베자가 수십 번씩 억지로 머릿속에 새겨 넣은 장면을 이제는 눈 돌리지 않고 쉽사리 그려낼 수 있었다. 상상 속에서 움직이는 손은 주저하지도 헛손질을 하지도 않았다. 표적을 놓치는 법 없이 늘 일격에 숨통을 끊었다.


"…나를 믿는다고."


맥없이 터져 나온 헛웃음이 공기를 하얗게 물들였다.



* * *



텅 빈 오두막 안에 바람소리만이 울렸다.


세실은 열린 문 밖으로 어두운 보랏빛 뒷모습이 눈보라에 새하얗게 파묻혀 사라질 때까지, 네모난 모양으로 잘려나간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방 안을 휘젓는 바람은 손아귀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벗의 흔적마저 앗아가 버렸다. 천천히, 세실은 얼어붙은 몸을 움직여 팔을 앞으로 뻗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문고리뿐이었다.


세실은 열린 채로 삐그덕 소리를 내던 문을 다시 닫았고,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집어 들었다. 벽난로에 카인이 바깥에서 가져온 장작을 두어 개쯤 던져 넣자, 흔들리던 불길이 잠잠해지며 한층 더 따스한 온기를 방 안에 풀어내었다. 벽난로의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세실은 걸음을 옮겨 반대편에 자리한 소파에 담요를 대충 집어던졌다.


세실의 평정심은 거기까지였다.


젖은 갑옷의 무게를 받아내는 쿠션이 푹 꺼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기사는 깊고 긴 숨을 내쉬었다. 걷잡을 수 없는 떨림이 멈출 때까지 천천히, 계속해서 길게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려진 시야에, 잠시 가라앉았던 희미한 장면들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세실은 자신의 검 앞에서 스러지는 마도사의 두려움에 찬 눈동자를 보았다.


그는 동굴 바닥을 적시는 용의 피 냄새를 맡았고, 안개의 장벽을 헤치는 손끝에서 차가운 슬픔을 느꼈으며,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불타는 마을, 자신의 손으로 피워 올린 불의 장벽 너머에서, 세실은 어머니를 찾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서없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우성쳤다.


문득 비공정 사이를 이은 교두보를 사이에 두고 카인을 바라볼 때, 세실은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끄무레한 분노를 털어내기 위해 두 손 안에 감싸 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어떻게 이런 것들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카인은 상당히 자주 동료들의 곁에 없었고, 빈자리를 메우는 골베자의 존재, 사악한 마도사가 수족으로 부리는 것들에 대한 기억은 카인의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잔인하게도 세실은 그것을 친우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고자 했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고해를 부득불 받아내고자 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지난날의 불화가 현재에 와서 카인과 자신의 관계를 흔들 수는 없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제가 기억해낸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 부분들이었는지 알았더라면, 결코 이따위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터였다.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울렸다. 눈앞의 환상이 눈꺼풀 아래의 어둠 속으로 흐려지자 힘겹게 목을 태워 들어가던 호흡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카인이 자신에게 남겨두고 간 온기어린 정적 속에서, 세실은 그가 말한  '유예'가 무엇인지, 조금 전의 차갑게 날을 세운 몇 마디가 카인이 세실에게 줄 수 있는 처음이자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서는 대답해줄 말이 없었으니, 카인이 애써 침묵을 유지한 것이 당연했다. 애초에 세실에게는 감히 물어볼 자격조차 없었다. 


스스로를 향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피어올랐다. 카인은 줄곧 그래왔듯이, 끝까지 순진하기만 한 친우를 그들 모두의 상처로부터 감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세실은 제 얼굴을 덮고 있던 두 손을 떼어냈다. 몰려오는 기억에, 감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리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공연히 장작이라도 더 집어넣기 위해 뻗은 손바닥에는 수많은 사람의 몫이 뒤섞인, 보이지 않는 혈흔이 두텁게 묻어있었다. 벽난로에 갇힌 불길 앞에서, 세실은 희미하게 남은 벗의 온기마저 떠난 그 손을 망토자락에 문질러 닦아내었다.


눈앞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튀어오르는데, 오직 저 혼자서만 그 흔적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세실은 밖으로 나선 카인이 점점 더 거세어지는 눈보라를 헤치면서까지 멀리 떠나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돌아올 이를 맞이하기 위해 침대와 가구들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눈바람이 더 거세져 처마 밑을 덮치기 전 마른 장작을 하룻밤을 종일 태우고도 더 쓸 만큼 집안에 옮겨놓았고, 덕분에 벽난로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오두막 안을 비와 식은땀으로 푹 젖은 셔츠까지 벗어놓은 채 활보할 수 있었다. 식수를 구하는 것은 바깥에서 막 쌓인 깨끗한 눈을 냄비 가득 퍼오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세실은 찬장에서 지저분한 용기에 담긴 몇 가지 향신료를 발견했고, 반쯤 말라가는 호밀빵 한 덩이와 싸구려 증류주까지 끄집어내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진흙을 씻어낸 갑주는 깨끗하게 손질된 채 건조한 실내의 그늘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세실은 하나뿐인 침대를 포함해 집안에 두 명 분의 침구가 있는지 확인했고, 그 다음에는 옷장에서 젖은 옷을 대신할 낡아빠진 의복 몇 개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친우에게 미처 전달하지 못한 담요를 둘둘 말아 품에 끌어안은 채, 불가에 주저앉아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출입문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부옇게 흐린 창밖이 어둑해지고,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도 카인이 돌아오지 않자 세실의 마음에도 걱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돌아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바람이 문틈으로 웅웅 새어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실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 너무 뻔뻔해보일 것 같았다. 어줍잖게 사과를 했다간 오두막에 갇힌 시간동안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어쩌면 이번에는 그의 친우대신 세실 자신이 쏟아지는 눈과 어둠 속으로 뛰쳐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 때,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에 섞여 멀리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실은 문을 응시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는 곧장 오두막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고, 세실은 여전히 한 손에 담요 뭉치를 든 채 다른 손을 뻗어 벽난로 옆에 세워둔 자신의 검을 손에 쥐었다. 눈을 밟는 소리가 삐걱이는 문 앞에 멈춰 섰고, 문 밖에 드리운 그림자는 잠시 그곳에 가만히 머물렀다.


세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잘 마른 맨발이 마룻바닥을 딛고 문가로 나아갔다. 손잡이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문에 다가갔을 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카인!"


세실은 네모난 모양으로 조각난 바깥 풍경에 우뚝 선, 낯익은 용머리 투구를 알아보고는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젖어있었고, 열린 문으로 뿜어진 열기에 붉어진 얼굴에 마른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세실은 손에 들려있던 담요를 카인에게 건넸다.


"뭐, 뭔가 잡았어?"


불쑥 튀어나온 말은, 생각했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다.



* * *


 
"이것을…"


카인은 마을 앞 숲에서 사냥한 새끼 사슴의 시체를 애매하게 들어보였다. 한쪽은 담요를 내밀고, 한쪽은 사슴을 건네려는 사이 서로의 손들이 멈칫거리며 잠깐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아…"
"우선, 안에."


결국 세실이 건넨 담요를 두 번째로 거절하고 카인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두막에서 나가기 전 벗을 상처입힐 말들을 잔뜩 뱉어냈기에, 카인은 세실이 홀로 떠났을 가능성까지 대비하고 있었다. 돌아갔을 때 벗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 두려웠으나, 그대로 남아있을 것도 똑같이 두려웠기에 눈보라 속에서 지지부진한 사냥을 이어가며 오두막으로 돌아갈 시간을 미루었다. 둘 중 무엇이 더 나쁜지 여전히 고르지 못한 채, 카인은 마룻바닥에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부엌으로 들어가 사냥감을 내려놓았다. 그가 떠나기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오두막은 이제 사람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처럼 따뜻하고 아늑했다. 카인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꺼내놓은 식탁 위를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조여들었다. 카인은 잠시 주저하다, 이내 세실 쪽을 돌아보았다.


"제법 기다렸겠군. 일단 식사 준비부터…"


세실과 눈이 마주치고 카인은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렸다. 세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곧 카인의 시선을 피했다.


"…그보다는, 우선 옷을 좀 벗는 게 좋겠다. 그렇게 젖은 채로 계속 있었다간 갑옷뿐 아니라 네 몸도 상할 거야."


흰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진 채 성기사는 바닥 구석 어딘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를 평이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욱 딱딱하게 걸려 나왔다.


"저기… 옷장에 옷이 좀 있어. 낡긴 했지만 잠깐 입을 수는 있을 거야."


작은 문을 가리키며, 세실은 침범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거리를 지켰다. 무언가 더 말을 걸려다 포기하고 카인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눈바람을 오랫동안 정통으로 맞아 얼음장 같은 갑주를 탈의하기 시작했다. 습기에 젖은 투구를 제일 먼저 벗어놓고, 견갑과 흉갑을 제거했다. 팔 보호대를 벗겨내고, 몸에 맞게 제작된 하반신의 갑주가 뒤따랐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간소화된 바론 전통의 용기사 갑주는 수발을 들어줄 사람 없이 홀로 입고 벗는 데도 큰 지장이 없었다. 푸른 별에 있을 적부터 카인은 세실 앞에서 투구를 벗는 것을 꺼려왔지만, 무장이 필요 없는 집에서까지 그럴 수 없었다. 익숙한 그늘이 사라진 밝은 시야에 적응하며 카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까와 같은 일은 더는 없어야 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세실의 불안감을 최대한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


얇은 천옷으로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집안은 따뜻했다. 환복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세실은 부엌 한구석에 새끼사슴을 막 거꾸로 매달아놓고 있었다.


"이리 줘. 내가 하지."


늘 쓰는 단도를 꺼내들며 사냥감 앞으로 나섰다. 세실 역시 무언가 말하려는 기색이었다가 도로 삼키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세실이 빵을 자르고 감자를 깎는 동안 카인은 사냥감을 도축하기 시작했다. 단도로 양쪽 다리에 흠집을 내고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낸 후 배를 갈랐다. 필요한 장소에 몇 번의 칼질을 더하자 발밑의 나무 양동이에 피와 내장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창이 관통했던 부위를 잘라내는 일은 조금 더 까다로웠다. 경직된 근육과 뼈를 가르다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던 탓일까, 순간 단도가 경로를 벗어나 뼈를 긁으며 얼굴과 새로 갈아입은 옷에 피가 튀었다. 카인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낡은 옷에는 이미 희미하게 핏자욱이 남았다.


곧 카인은 두 사람이 충분히 먹을 양의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손질해 세실에게 건넸다. 세실이 고기를 조리대로 가져가고, 얼마 안 있어 향긋한 냄새와 지글거리는 고기 굽는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카인은 단도에 묻은 피를 닦고, 잔여물을 정리하고, 남은 고깃덩어리는 밖에서 얼리기 위해 한쪽으로 쓸어담았다. 문득 그것들이 머지않아 한 사람분의 식량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둘 사이의 공기는 여전히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 혈흔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인은 얼굴을 다시 한 번 닦았다. 세실이 그의 가려지지 않은 얼굴에서 무엇을 알아낼 것이, 자신의 표정이 스스로를 배신할 것이 두려웠다. 세실은 아직 이쪽을 보지 않은 채, 낡아 보이는 증류주 병과 두 개의 술잔을 막 식탁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인은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약간의 계산 끝에 입을 열었다.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았어."


식탁에서 눈을 뗀 세실이 조금 놀란 듯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카인은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바론에서. 너도, 나도, 훈련병을 벗어난 후엔 시간이 얼마 없었고, 우리 둘 다 그런 자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 ……꽤나 오랜만이군."



* * *



"오랜만…인가."


카인의 마지막 말을 혼자 되풀이하며, 세실은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마주쳐오는 벗의 눈길을 피했다. 막 뚜껑을 연 술병을 든 채였다. 그는 나름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짧은 문장을 곱씹으며 유리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꺼내는 추억담은 어리석은 제 친구를 위한 카인의 작은 배려일 터였다. 낡고, 어찌 보면 잊어버렸어도 무방할 만큼 사소한, 그러나 지금의 불안을 달랠 수 있는 작은 조각들이 카인으로서는 세실에게 꺼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인 모양이라고. 술잔을 반쯤 채워 카인의 자리에 두며, 세실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순간 품었던 몇몇 희망사항들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으면서 세실은 입을 열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더 이상, 그의 벗에게서 무언가를 끌어내려 애쓰지 말자고. 조용히 떠오른 상흔들을, 구태여 입에 올려 혼란을 초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결코 짧지 않은 침묵 끝에, 세실은 입을 열었다.


"그래. 항상 내가 너보다 먼저 취했던 건 기억난다."


잔을 들어올리자 군데군데 뿌옇게 변한 유리잔 속에서 투명한 액체가 일렁거렸다. 세실은 그 너머에서, 이제는 드리워진 그늘조차 없이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짙은 시선을 마주보았다.


"바론의 만찬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한 잔 마시기엔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지?"


단조로운 나무 테이블은 가만히 앉아 손만 뻗어도 반대편에 닿을 만큼 작았고, 덕분에 팬 하나와 접시 두 개, 식기와 술잔만으로도 제법 푸짐해 보이는 착각을 일으켰다.


세실은 조심스럽게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반대편에서 다가온 술잔이 함께 기울며 쨍 하고 가벼운 소음을 내었다.


투명한 증류주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독했고, 걱정과는 달리 건조한 향이 입안에 맴돌다 순식간에 사라질 뿐이었다. 알콜이 식도를 태우는 것을 느끼며 세실은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내가 네게 먼저 찾아갔었어."


술기운이 벌겋게 오른 얼굴을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로 세실은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는 몇 안 되는 술에 대한 기억들 중에서 둘이 함께 참가한 첫 전투가 끝난 밤의 일들을 끄집어내고 있었고, 카인에게 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그 날 밤에 대한 기억은 주로 감정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검을 쥘 각오만으로 전장에 나서서, 처음으로 스스로 사람을 벨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날, 날붙이 끝에서 꺼져가는 숨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며 치를 떨었던 기억들. 세실은 끝내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해 제 오랜 벗을 찾았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평온함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견습 기사 카인 하이윈드를.


"그때… 나는 네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하다못해 그 독한 술을 우리 둘이 다 비울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술을 목 뒤로 삼키며 세실은 잠시 숨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벌써 희뿌옇게 뜨기 시작한 시야에 지난 기억들이 어지럽게 지나다녔다. 지금보다도 더 술에 절어있던 젊은 암흑기사는, 그 못지않게 잔뜩 취한 친구에게 거의 기대다시피 늘어져서는 무언가 기억나지 않는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 다음이 뭐였더라. 세실은 무심결에 쿡쿡 찌르던 포크에 짓이겨지고 있던 감자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문득 짙은 입술이 눈앞을 스쳤다.


세실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울긋불긋해진 눈꺼풀이 새파란 눈을 감싼 채 동그랗게 커졌고, 그는 기억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그리고 여전히 불빛에 나긋하게 일렁이고 있는 보랏빛 눈을 바라보았다.


"…카인."


세실은 자신이 스스로 정한 약속을 깨고 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 때 우리가 키스했던가?"



* * *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전장에 기사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카인이 언젠가 첫 전장에서 겪게 될 일들을 설명하며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말이었다. 여러 번 실전에 가까운 혹독한 훈련을 거쳤기에 최초로 사람을 죽였을 때도 카인은 얼어붙지 않을 수 있었다. 내찌른 창이 첫 적의 가슴을 꿰뚫고, 두 번째 적의 목을 긋고, 셋, 넷, 다섯, 세는 것을 잊을 정도로 끝없이 찌르고 베어내고 부쉈다. 수많은 자의 피로 범벅이 된 채로도 창을 쥔 손은 떨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날 카인은 리차드 하이윈드의 가르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전장에 기사도는 없었다. 오직 살육과 광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 잔인함이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낯설었다. 같이 전투에 투입되었던 견습 기사들 중에는 첫 살인의 후유증에 구토하고 악몽에 시달리는 자들도 있었고,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초조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날 밤 같은 전투에서 귀환한 세실이 다가왔을 때 카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마음 여린 친구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반, 그럼으로써 아직 제 안에 남아있는 기사다움을 확인하고픈 욕망이 반이었다. 세실을 달래기 위해 평소라면 거절했을 독주를 연거푸 받아 마신 끝에,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저질렀다.


카인은 답을 기다리고 있는 세실의 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보고, 짧게 대답했다.


"했었지."


목소리에 감정을 담지 않으려 했으나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뒤에 이어질 세실의 표정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에 카인은 눈앞의 잔을 비웠다.


당연하게도 키스만 나눈 것은 아니었다. 카인은 그날 이전까지 술이 판단력을 얼마나 흐릴 수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다음 날 깨질 듯한 두통에 깨어나 반쯤 벗어던져 흐트러진 옷가지와 전날 밤의 너저분한 흔적들을 발견했을 때, 카인은 세실의 눈을 보지 않았고 세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침묵과 어색함 속에 옷가지를 주워 입고 주위를 정돈했다. 그 뒤에도, 둘은 암묵적으로 합의한 듯 그날 밤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독한 술을 제법 마셨음에도 지금은 술기운이 돌지 않았다. 세실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봐 왔던 그의 버릇이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흰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 그는 마치 아주 중요한 사실을 떠올려내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누가… 먼저 했었지?"


그 순간, 카인은 세실을 완벽하게 속일 방법을 깨달았다. 그의 불안을 달래고, 의심을 가리고, 무장을 남김없이 해체시키고 무방비하게 만들어 계획을 성공시킬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잔인한 방법을.


"…세실."


푸른 눈동자가 이 쪽을 돌아보았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카인은 세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의 눈을 보며 천천히,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세실 역시 움직였다. 촛불에 노랗게 반짝이는 흰 속눈썹이, 술기운에 붉어진 뺨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마침내 입술이 닿았다. 뜨겁고 보드라운 감촉이 맞닿고,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잠시 후 떨어졌을 때 세실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카인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같았어."


둘 모두의 실수였어. 읊조림에 무어라 답하기 위해 벙긋거리는 입을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술로 덮어 눌렀다. 두 번째 입맞춤은 더 길게 이어졌다. 살짝 창백한 입술의 감촉은 중독적으로 달고 보드랍고 그 때와 똑같았다. 벗의 입안을 침범하기 위해 혀를 움직이자 다물린 입이 순순히 벌어졌다. 그 안의 혀와 여린 점막을 갈증 난 것처럼 탐했다.


억누르고 짓이기고 수없이 벽을 세웠음에도 죽지 않은 욕망의 불씨가 되살아나 뱃속을 불태웠다. 머릿속의 가장 냉정한 부분은 그 욕정이 필요한 만큼 밖으로 나가도록 조금씩 더 허용했다. 혀를 집요하게 얽으며 움직임을 쫓아가자 세실이 얕게 신음했다.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난 채 카인은 세실을 테이블에 밀어붙이며 키스를 이어나갔다. 나무 바닥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밀려나고 술잔 안의 남은 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얇은 천옷을 걷어올려 허리선을 타고 쓸어올리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세실의 손이 그를 껴안듯 끌어당겨왔다. 순간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은 세실의 몸을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한 손은 테이블에 얹었다.


"세실."


아직 무엇을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서로의 숨결 안에 헐떡거리며 보라색과 푸른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음에도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했다. 목구멍에 걸린 듯 나오지 않는 질문을 짓씹다가, 마침내 고통스럽게 뱉어냈다.


"나를 믿을 수 있겠어?"


단순히 앞으로 일어날 행위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둘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들과, 그 뒤에 다가오는 결말과, 이제부터 자신이 저지를 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겠느냐고. 세실을 구하고 싶었다. 카인이 누군가를 구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세실이어야 했다. 전사들 모두를 향해 닥쳐오는 패배가 세실만은 빗겨갈 수 있도록, 그가 잔인한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저주받은 세계에 박제된 신의 장기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카인은 자신의 계획을 냉정하게 들어줄 유일한 동료를 찾아갔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빛의 전사가 곧 불명예스러운 임무를 자처하고 나섰으나 카인은 양보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임무였고,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했다. 그것이 면죄부를 갈구하는 어리석은 발버둥일지라도.


떨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 순간만큼은 감정을 숨길 수 없어 눈가가 일그러졌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고해하는 기분으로 질문을 털어내었다. 아니, 애원했다.


"나를… 믿어주겠어?"



* * *



입술이 닿는 촉감이 낯설지가 않았다.


짧게 마주대었던 입술은 그답지 않게 진득한 감각을 남기며 떨어져나갔다. 무언가를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짧은 순간이었다. 세실은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질문들을 하나도 입 밖으로 내어놓지 못했다. 입을 여는 순간 두 번째 키스가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늘 다물려있던 짙은 색의 입술이 먼저 그 틈을 드러내고 아랫입술을 지분거렸기에, 세실은 입 안으로 카인의 가장 여린 부분들 중 하나를 받아들였다. 옅은 알콜 향이 혀 끝에서 함께 얽히고, 그를 삼키는 동시에 앓는 소리가 입 안을 울렸다. 스스로 낸 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지만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윽고 세실은 자신보다 조금 높은 상대의 입술에 달라붙기 위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무엇에 취한지도 모를 정도로 혀를 얽고 몸을 어루만졌지만 그런데도 어딘가가 허전했다. 키스를 이어갈수록 갈증이 일었고, 밀어붙이는 몸의 무게에 세실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더 물러날 곳이 없어 뒤로 고꾸라질 때에 그것을 받쳐준 것 역시 카인의 손이었다.


그리고 다시, 어둑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인의 몸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그의 팔 안에 갇힌 채로 세실은 무언가 대답하려 했다. 그래야만 했다. 지금껏 그토록 거절해왔음에도 이제야 카인이 필요로 하는 그 믿음을, 카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오랜 침묵을 깨고 카인의 표정에 처음으로 드러난 균열을 마주하며, 키스로 젖어든 채 다물릴 줄 모르는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간신히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고통스러운 신음뿐이었다.


세실은 무거운 말을 대신하는 그 찰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애썼다.


일그러진 그의 이면에서 세실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한편으로는 익숙한 용기사의 결의에 찬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짙은 그늘이 드리운 채 아래를 향한 카인 하이윈드의 표정은, 바론의 젊은 암흑기사가 기억하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워보였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실은 옅게, 그러나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믿고있어, 카인. 하지만…"


우습게도, 세실의 마음에 덜컥 두려움이 차올랐다.


세실은 카인 하이윈드를 이토록 동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저 기억해내지 못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차마 단언할 수가 없었다. 카인이 제 벗에게 말해주지 않은 채 홀로 품은 결단이, 그것을 만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막이 마음에 걸렸다. 카인이 끝끝내 이어가려는 이 행위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로 잊은 것처럼 묻어온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가져올 결과가, 못내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끝내 카인이 원하던 답을 내놓지 못한 것 같았다.


허리 위에서 맴돌던 손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열기가 오른 살결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뒷말은 들을 생각이 없었던 듯 곧바로 덮쳐온 카인의 입술이 잇새로 새어나오던 말을 삼켜버렸다. 무겁게 떨어지는 발걸음이 무게중심을 더욱 뒤로 밀어냈고, 세실은 뒷걸음질을 치며 힘에 부친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두 사람의 무게가 연달아 지나가는 낡고 닳은 마룻바닥이 불안정하게 휘며 삐그덕거렸다.


"그 날, 그 날 밤에…"


입술을 떼어내며 세실은 헐떡거렸다. 또다시 한 걸음이 밀려들어왔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세실은 흘깃 뒤를 보았다. 드러난 목덜미를 노린 카인의 숨결이 훅 끼쳐왔다. 또 다시 몇 걸음 발을 옮기는 동안 더욱 대범해진 걸음이 집요할 정도로 따라붙었다. 세실은 낮과 밤이 흐려지는 경계선의 빛이 내려앉은, 카인의 짙고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아래, 채 숨기지 못하고 잔잔히 새어나오는 격앙된 욕망의 일렁거림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선에 압도되어서, 세실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낡은 나무 문이 닿아왔다.


자신의 허리를 감았던 손이 문손잡이로 향하는 것이 보였고, 세실은 한 손으로 카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건 실수가 아니었어." 


거의 소리치듯 말을 내뱉고, 움찔 멈춰서는 카인을 올려다보며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심장이 떨어질 듯 쿵쿵 달음박질을 해댔다. 상대 역시 짧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선 가장자리에서 흥분을 가라앉히는 흉부가 흰 천옷에 감싸인 채 규칙적으로 오르내렸고, 카인은 아직도 그 무감정한 표정으로 눈길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말뜻을 이해한 카인의 눈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 세실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트렸다.


술을 그렇게나 마셔댔는데도 목이 메여왔다.


그새 바싹 말라붙은 입술이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바르르 떨렸다.


세실은, 마침내 속삭이듯 흘러나온 자신의 목소리가, 타고 남은 재의 불씨처럼 곧 사그라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약 실수였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서 멈춰야 해."



* * *



더운 공기 속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벽난로의 불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 걸음이면 산산이 부서질 간격만큼이나 위태로운 정적을 깨지 못한 채 카인은 붙잡힌 손을 쥐었다 풀었다하기를 반복했다. 오랜 시간 서로 묻어두었던 그날 밤의 기억이 마침내 언어가 되어 나왔을 때 그는 더 세실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겨우 꺼내놓은 한 마디가 정적 사이에 흩어지고, 카인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뒤엉킨 감정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한 마디만 하면 세실은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세실 자신이 원했던 일이라고, 그간 분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 억눌러왔던 욕망이 실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세실이 내어주는 모든 것을 취하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고, 동시에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심장을 옥죄어왔다. 그 눈동자를 마주보고서도 감히 자신이 하게 될 일을 구원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 카인은 알지 못했다. 더는 거짓으로 세실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만이 공기 속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그가 움직이는 것을 막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세실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엇갈리던 두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카인은 천천히, 세실에게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의 일부를 내보냈다.


"이건, 실수가 아니야."


반나절 전과 똑같이 위태롭게 손목을 잡은 손을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반대쪽 손으로 천천히 감싸 잡았다. 나를 믿어줘, 용서해줘, 더는 실패하지 않아, 전해지지 않을 말들이 어지럽게 용솟음쳤다. 그것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바로잡는 거야."


끼익,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침착하지 못한 걸음이 한 발짝씩 전진했다.


등 뒤로 침대 발치를 더듬어 잡는 세실을 그대로 흰 시트 위에 쓰러뜨리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옷의 허리께를 묶은 끈을 성급히 풀어냈다. 몸을 가린 옷을 벗어던지며 카인은 낡은 협탁 위에 벨트와 잡다한 것들을 풀어놓았다. 그 사이에 거추장스러운 물건인 양 던져놓은 단도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가늠하며 하얀 목덜미에 키스를 이어나갔다.


피하듯 뒤로 휘어지는 허리를 붙들어 잡고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열어 벌렸다. 천천히,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허벅지 사이의 달뜬 열기를 무릎으로 문지르자 세실이 시트를 붙잡은 채 얕게 신음했다. 뒤늦게 닥쳐오는 어질한 술기운과 방을 데우는 열기가 섞여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카인은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로지 벗의 입에서 흘러나온 쾌락에 젖은 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다는 충동으로, 세실의 몸을 가린 옷가지를 거의 찢어낼듯이 벗겨냈다.


하반신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천을 마저 걷어내며 카인은 창백한 몸을 남김없이 눈에 담았다. 뼈대가 얇지만 잘 단련되어 군살없이 근육으로 채워진 몸 위에 어지러이 흉터들이 수놓아졌다. 어린 시절 대련하다 다친 곳, 암흑기사 시절 적에게 얻은 것, 붉은 날개의 임무 도중 마물에게 당한 흔적, 사천왕 중 하나를 상대하다 입은 부상, 이 세계에 와서 새로 생겨난 것들까지. 카인은 세실의 몸에 새겨진 대부분의 전투를 함께했고 그 중 몇 개는 자신의 창으로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 모든 흉터들과 수많은 싸움과 그들이 함께 손에 묻힌 피에도 불구하고, 촛불 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몸은 일순 순결하게마저 느껴졌다.


"세실…"


흰 살결을 구석구석 훑으며 그 위에 낮은 한숨을 흘려냈다. 갈라진 복부를 따라가다 골반뼈 바로 위의 옆구리에 난 자상의 흔적에서 손이 멈추었다. 파불 성 크리스탈 룸에서 자신이 상처 입힌 자국이었다. 잠깐의 주저를 깨달은 듯 세실이 멈칫했지만 카인은 곧 그 흔적에 입을 맞추었다. 피부가 찢기고 다시 돋아난 자국 위를 진득하게 핥아내리며 이윽고 아래로, 더욱 아래로 향했다. 오므린 무릎 사이를 직접 손으로 잡아 벌리는 대신, 카인은 침대 밑으로 내려가 세실의 하반신 앞에 자리한 채 입술을 혀로 핥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절한 욕망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명령에 가깝게 흘러나왔다.


"다리 벌려."



* * *



더 이상 반문할 수가 없었다. 


세실은 끝내 문 뒤로 물러났고, 카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문이 가로막았던 방에는 벽난로의 불빛이 닿지 않았고, 한 사람이 자리할 수 있을 정도로 열어젖힌 허벅지와 달아오른 체온 사이로 냉랭한 공기가 섞여들었다. 보랏빛이 거의 지워진 입술이 은연중에 고개를 쳐들고 있던 욕정의 끝에 닿는 순간, 세실은 움찔 몸을 떨며 숨을 삼켰다. 젖은 혀가 감싸안아 입안에 머금은 귀두에 단 숨이 눅눅하게 젖어들었을 때, 숨소리는 혼탁한 신음이 되어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아…! 카인…!"


반쯤 밀어젖혀졌던 상체를 팔꿈치로 지탱한 채 세실은 시선을 제 몸 아래로 내렸고, 스스로 낮은 곳에 자리한 친우의 혀끝이 주름진 접합부를 자극하고, 기둥을 이따금씩 입술 사이로 머금으며 길고 느릿하게 핥아내리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밝은 금색 머리칼은 흐트러지지 않고 정갈하게 묶여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마 위로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유독 길이가 맞지 않는 한 가닥만이 카인의 입이 내는 질척한 소리를 따라 시야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고, 세실은 조심스럽게 왼손을 뻗어 머리칼을 얼굴 위에서 거두어내었다. 문득, 보랏빛의 시선이 마주쳐왔다. 곱게 올라간 눈꼬리가 뜨겁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시선 속에서, 오직 욕망만이 빛바랜 기억 속에서부터 그대로 눈앞에 살아남아있었다. 세실은 울렁거리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벗의 말소리도 몸짓도 아닌 오로지 그 열기에 의지했다. 시선에 담긴 그의 가장 오래된 욕망들 중 하나, 오직 그 하나만큼은 카인이 숨기지 못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진실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카인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순순히 내어준 벗의 몸이 조금이라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을 찾으려 했으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의 앞에서 세실의 모든 곳은 한없이 여리기만 했으니까. 때문에, 카인이 선단부터 천천히 제 입 안으로 미처 준비되지 않은 성기를 완전히 집어삼켰을 때, 눅진하게 들러붙는 점막이 제 것을 가볍게 빨아당기는 것에 허리를 후드득 튕기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민감한 곳을 감싸는 축축한 온기를 느끼며 세실은 제 발을 바닥에 무릎 꿇은 카인의 다리 사이로 가져다 대었다. 일순 동요하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맨다리 사이에 드러난 선단을 건드렸고, 이내 전체를 지긋이 압박하며 자극을 이어나갔다. 이미 상당한 부피감이 느껴졌고, 우습게도 그것에 되려 흥분한 것 역시 세실이었다. 움찔 떨리는 허벅지엔 자꾸만 붉게 상기된 뺨이 닿아왔고, 흥분에 떠는 발끝이 오므렸다 피기를 반복하며 다시 상대를 자극하고 있었다.


뿌리 주변을 지분거리다 발등으로 아래쪽을 훑어올리며 가벼운 발장난을 이어가는 중, 카인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놓고 세실은 침대 옆 탁자 서랍을 뒤졌다. 주의를 빼앗기자 훼방이라도 놓을 셈이었는지 성기에 강한 자극이 닿았고, 입천장의 도드라진 벽과 말캉한 혀 사이에서 압박감에 숨을 헐떡이며 세실은 간신히 향유가 담긴 작은 병을 끄집어내었다.


"카인, 그만… 흣…! 거긴 이제 됐어."


세실은 조급한 손길로 카인을 제 다리 사이에서 떼어내었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카인이 그를 준비시키기 위해 허벅다리를 들어 젖혔고, 침대 위에 완전히 눕혀진 세실이 배 위에 병을 기울여 향유를 쏟아부었다. 맑은 기름이 골반을 따라 허리 아래로, 다리 사이의 틈으로 흘러내렸다. 반질거리며 길게 퍼져나가는 흔적을 따라 꽃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세실은 병을 들지 않은 손으로 피부 위에 고인 액체를 가볍게 쓸어내렸고, 카인의 골반을 타고 뚜렷한 흔적을 남긴 젖은 손길이 발아래에서 온연히 모양을 갖춘 물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기대감 어린 신음이 흐르는 입을 카인의 입술이 덮어누르자 금색 머리칼이 뺨 위로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용기사가 휘두르는 창 못지않게 섬세하고, 유려한 손길이 배 위를 간질이는 동안 차가운 향유는 손바닥과 뱃가죽 사이에서 미적지근하게 달구어지며 흰 몸 위를 반질반질하게 뒤덮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세실은 카인의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고, 말과는 다르게 재촉하듯 카인의 밀부를 고환부터 선단까지 끈적하게 쓸어올렸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실은 어서 카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취하고 싶었고, 그럼에도 그 체온이 식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곁에 머물렀으면 했다. 조급함 때문에 순식간에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말로나마 조금이라도 더 살을 마주대는 이 시간을 지연시켜보려 했다.


하나 다행인 것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이 그들에게 결코 짧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 * *



그간 스스로를 인내심이 부족한 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오랫동안 상상해온 몸을 눈앞에 두고 서두르지 않는 것은 어려웠다. 아랫도리에 훤히 드러낸 욕정에 세실의 손이 스칠 때마다 등골이 오싹거렸다. 익숙한 체취, 술의 향과 꽃내음이 더운 공기에 섞여 방 안을 맴돌았다.


카인은 세실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진한 라벤더향이 나는 오일에 손가락을 담뿍 적셨다. 액체로 반들거리는 중지와 약지로 원을 그리듯 입구를 지분거리다가, 꽉 다물린 주름 사이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그 즉시 손가락을 움찔 조여 오는 내벽을 느끼며 카인은 잇새로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곧 손가락을 부드럽게 왕복하며 내부를 넓혀갔다. 달아오른 세실의 몸이 손가락을 삼킬 때마다 오로지 조급해지지 않기 위해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야 했다. 세실을 가지고 싶은 마음과 세실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물론 카인은 그 생각이 얼마나 우습고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세실의 모든 기억이 온전했더라면 그가 자신을 받아들였을지, 제 몸의 흉터들의 출처를 전부 알았더라도 지금처럼 카인의 손에 몸을 맡길 수 있었을지. 이제 와서 의문을 가져도 소용이 없으며,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목적을 잊지 않는 것.


그 목적을 머릿속의 가장 차가운 구석에 밀어넣고 카인은 행위에 집중했다. 잠깐이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세실의 앞에서 스며나온 액체와 걸쭉한 향유가 섞여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실이 느끼는 지점은 얕은 편이었다.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 내벽의 중간 즈음을 긁어내듯 하자 허벅지가 움찔 떨리며 달뜬 목소리가 새나왔다. 카인은 손가락을 구부려 그 지점을 거듭 자극했다. 세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집요하게 더욱 약한 부분을 파고들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속눈썹이 떨리며 푸른 눈동자가 눈꺼풀에 숨겨졌다가 다시 크게 뜨이고, 벌어진 입술이 막힌 숨을 내쉬는 것을. 친우를 두고 했던 음습한 상상들은 현실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세실의 입에서 짓씹듯 애원이 나오고 난 후에야 손을 멈췄다.


"…카인, 어서…"


그 한 마디만으로도 불길을 지핀 듯 아랫도리에 묵직한 열기가 더해졌다. 찐득한 물소리가 끊어지며 손가락이 빠져나오고, 세실의 위로 올라가기 직전 카인은 더운 숨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괜찮겠나."


그렇게 물었지만 실은 멈출 생각 따위 없었다. 세실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희열감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대답 대신 입맞춤이 돌아왔다. 어서, 나를, 습기어린 입술 새로 드문드문 흘러드는 재촉에 남은 자제력마저 씻겨져 나갔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다시 한 번 두 시선이 맞닿았다. 순간 카인은 숨을 삼켰다.


"……"


푸른 눈동자를 흐리게 만든 욕망과 나른한 쾌감, 약간의 불안감. 그 뒤로,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어떤 이유에서인지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카인을 믿고 있다고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조트의 탑에서 돌아온 후 카인은 언제든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며 세실을 설득하려 한 적이 있었고, 그때도 세실은 신뢰를 입에 올렸다. 봉인의 동굴에서 같은 주술이 정신을 사로잡은 순간 카인은 벗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하지만 카인이 두 번째로 돌아왔을 때마저 세실은 카인을 탓하지 않고 받아들여주었다. 처음으로 카인은 세실의 맹목적인 신뢰가 실은 신뢰라기보다, 다른 가능성을 외면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기억이 온전했더라도 세실은 결국에는 똑같이 믿으려 했을 것이다. 단 하나뿐인 벗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결코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리라고. 당장 지금도 고작 카인의 너저분한 애원만을 담보삼은 채로 방비 없이 몸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정확히 카인이 의도한 바임에도 불구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뱃속이 들끓었다. 자신이 세실의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는지 마침내 직시한 기분이었다. 목구멍이 타오르고 눈썹이 고통스럽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얼굴을 일그러뜨린다면 들킬 것이다. 카인은 몸을 조금 내렸다. 여전히 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중심이 세실의 배 위로 끌리며 두 기둥이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눅진하게 풀어진 입구에 선단을 맞추며 카인은 세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세실 안에 자신을 파묻었다.


"…큿, 윽…"


좁고, 견디기 힘든 열감이 닥쳐왔다. 세실의 다리를 붙잡아 젖혀 누른 채, 살덩이에 감겨오는 압박을 파고들고 조금, 조금 더 밀어 넣으며 그 한계를 시험했다. 성기를 머금은 채 근육이 도드라진 흰 허벅지 위로 향유가 주륵 흘러내렸다. 삽입의 여파로 파르륵 떨리던 몸이 지탱할 곳을 찾는 것처럼 카인의 등을 끌어안아왔다. 세실의 도드라진 쇄골에 키스하고, 세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진실의 끝자락을 쾌감으로 덮어 누른 채, 카인은 밤의 그림자 속에 얼굴을 숨겼다.



* * *



세실은 배 아래로 스치는 뜨거운 촉감에 부러 예민하게 반응했다. 짧지만 선명하게 드러난 카인의 고통스러운 균열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세실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개중 다행인 것은, 카인이 먼저 고개를 숙여버린 덕분에 세실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입술을 짓씹은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으읏, 큭…! 아…, 으흐윽…!"


목덜미로 더운 숨이 쏟아졌다.


기억에서 흐려진 탓인지 지나치게 생소한 감각이 아랫배를 채워왔고, 세실은 쾌감인지 고통인지 모를 것에 진저리쳤다. 고개가 뒤로 꺾이며 마주 안은 가슴의 체온이 닿아왔다. 언젠가, 그 살결의 촉감이 다른 형태로 가슴팍에 닿았던 것 같았다.


버거웠다. 다리를 접어올리고 버둥거리는 사지를 내리누르는 친우의 몸, 등을 감싼 이불에서 나는 낯선 냄새, 안쪽부터 천천히 밀어내며 서서히 세를 늘려가는 존재감, 흐릿하게 의식 저편에서 어른거리는 기억들까지. 그 모든 것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몸이 짓이겨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르렁거리는 신음소리에는 분명한 열기가 비쳤지만, 동시에 그의 일그러진 표정 뒤로 언뜻 비치는 서늘함이, 카인이 말해주지 않았기에 세실 역시 답을 구하기를 포기한 그의 비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웠다.


"아, 흐윽! 카인! 제발, 잠깐…만…!"


그토록 공을 들인 삽입 끝에 카인을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받아내고, 세실은 탄성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쏟아내며 등 뒤를 굳게 끌어안은 그 몸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인 마냥 매달렸다. 안팎으로 몰려오는 압박감을 견디는 데에는 익숙하지 못한 이를 달래주려는 벗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면, 등 위로 팽팽하게 부풀어온 근육이 신음소리를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위를 부산스럽게 더듬는 세실의 손에 곱슬거리는 머리칼, 그것을 묶고 있던 조금 느슨해진 머리끈이 잡혀왔다. 머릿속까지 하얗게 질려가는 와중에도 카인의 그 정갈함이, 불안에 요동치고, 분개하고, 끝내 품에 안긴 와중에도, 정작 그를 이곳까지 이끌어온 벗이 유지하려는 그 평정심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결을 마주댄 카인의 목덜미에 좀처럼 진정될 줄 모르는 숨을 내뱉으며, 세실은 손가락 끝을 머리칼과 묶인 매듭 사이에 넣어 아래로 잡아당겼다. 얌전히 묶여있던 선명한 금색의 머리칼이 우수수 풀려 카인의 어깨 너머로, 세실의 몸으로 흘러내렸다.


"세실."


세실의 시선이 천천히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이윽고, 그는 주변을 온통 둘러싼 금색 머릿결 사이에서 여전히 서늘하게 일렁거리는 보랏빛 시선과 마주했다.


"괜찮아."


짧게 끊어지는 목소리가 담은 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하는 질문조차 아니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게도, 세실은 다시 한 번 매섭게 내리꽃히는 시선 속에 담긴 것을 캐내어보려 했다. 


달뜬 숨소리로 가득 찬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실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카인을 안고 있던 오른팔을 내려 눈가를 가렸다. 어느새 맺혀 있던 눈물이 팔등에 축축하게 배어났다. 잠겨가는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세실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에 능숙치 못한 그가 애써 말을 했더라면 분명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 카인이 몸을 움직였다. 살덩이를 따라 몸이 통째로 밀려나가곤 내벽을 가르며 다시금 뱃속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에, 시야를 덮은 아늑한 어둠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열린 입에서 울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가장 깊은 곳까지 밀어올리는 움직임에 온 몸으로 반응하며 세실은 카인이 주는, 처음이 아닌데도 낯선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실은 조심스럽게 속도를 더해가는 카인의 움직임에 천천히 제 몸을 맞추며 그를 더욱 부추겼다. 그토록 오랫동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걱정들이 찰나의 쾌락에 새하얗게 씻겨내려가고 있었다. 이물감 뒤로 천천히 타고 오르는 쾌감이, 흉내에 불과한 세계에서 그를 끊임없이 쫓아오던 불안을 너무도 쉽게 잠재워버린 것이 우스웠다. 입 속에서 흩어지는 신음 사이로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문득 얼굴을 가린 손이 치워졌다. 세실은 거기에 저항하지 않았고 할 일이 없어진 손을 머리맡에 그대로 내버려두었지만, 여전히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눈물과 열기로 흐릿한 풍경으로부터 눈을 돌리려했다. 곧이어 뺨을 그러쥐어 돌리는 손길이 있었다. 유려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이미 열려있던 입술을 짓이기고 혀를 내리누르며 장난을 쳐댔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세실은 어눌한 신음을 흘려내었다. 마지못해 가늘게 뜬 눈에 비친 풍경은 앞을 가득 메운 색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오직, 어둠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듯한 보랏빛만이 다른 것들에 섞여들지 않고 선명히 드리우고 있었다.


거센 추삽질에 카인의 성기가 깊숙한 곳에 닿을 때마다 몸이 점점 밀려났다. 세실은 카인을 끌어안던 손까지 놓고는 두 손을 위로 뻗어 침대 헤드를 받쳤다. 카인이 그 손목을 그러쥐고 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규칙적인 움직임마다 부딪혀오는 몸이 둔중한 충격으로 떨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흘러내린 머리칼이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가슴 위를 간질였다. 예민한 곳을 집요하게 찔러오는 동작에 온 신경이 감전된 것처럼 저릿했고, 자극을 전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뚱이가 경련하듯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뒤틀렸다. 퍽퍽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스스로 낸 신음소리, 어지럽게 흩어지는 카인의 낮은 숨소리에 섞여들었다. 뱃속이 뒤엉킬 듯한 쾌감에 스스로 허리를 뒤틀다, 그제야, 세실은 자신이 더 이상 떨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카인, 아으윽, 조금만 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여기 있었는지, 왜 그토록 벗이 숨겨온 비밀들을 엿보려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외면하려 했는지. 조금 전까지 카인은, 자신은 무슨 생각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그날 밤의 모든 일들이 몽롱한 꿈이었던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세실은 이제, 그것들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아랫배를 무겁게 때리는 감각에 몰두한 채, 카인의 몸이,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더 이를 데 없는 곳까지 스스로가 내몰리도록 내버려두었다.



* * *



여유가 없기는 카인도 매한가지였다.


최소한의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의식은 세실의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시시각각 어질한 쾌락으로 덮어씌워졌다. 한 번 허리를 젖힐 때마다 입구에 걸릴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빼내었다가 다시 뿌리까지 박아넣으며 세실의 몸을 침대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집중했다. 어린 시절에도 이렇게 성급했던가, 돌이켜보면 그랬던 것도 같았다. 첫 삽입을 간신히 견뎌내던 몸은 어느새 카인의 허리를 다리로 감아 안고 더욱 깊숙이 침범해줄 것을 갈구해왔다. 그러나 그 몸짓과 대조적으로 카인을 삼키는 내벽은 여전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빠듯하게 조여왔다.


"크, 읏-! 윽… 세실, 힘 좀…!"


거듭 안으로 끌어당기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빨랐다. 어느 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카인은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었다. 손목을 붙잡은 손을 놓고, 세실의 한쪽 다리를 어깨까지 밀어젖힌 채로 중간 즈음에서 느릿하게 왕복해대자 세실이 몸을 굳히고 잘게 울었다.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성급하게 쓸어넘기며 카인은 세실의 목덜미며 가슴에 구석구석 입을 맞추고, 떨리는 몸을 달래려 애썼다. 발버둥치며 한껏 옆으로 젖혀졌던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오며 흰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떨어지고, 그림자 속에 잠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그제서야 촛불 불빛과 함께 일렁거리는 세실의 물기어린 눈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카인은 다시 한 번 아득해지는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 찬 행위 모두를, 세실은 전부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안감을 눌러삼킨 채로, 그저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카인은 여전히 밤이 진실을 가려주리라고 믿었다. 채 숨기지 못한 스스로의 표정도, 심장이 내달리는 소리도 계속되는 행위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가장 가까이 맞닿은 채로도 그들은 평행선을 달리듯 한 꺼풀씩 숨기고 있었다.


지금과 달랐더라면.


어리석게도 여지껏 포기하지 못한 애달픈 희망이 피어올랐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 날 밤이 조금 달랐더라면. 바론에서, 미스트에서, 조트의 탑과 봉인의 동굴에서, 카인은 매번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을 했고 그 때마다 실패하여 세실을 조금씩 더 상처입혔다. 자신이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그때도 지금도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한순간 카인은 모든 전략적인 판단을 잊고 세실에게 윤회의 비밀과 예정된 패배와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느새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거칠어진 호흡을 천천히 고르고 있었다. 목구멍이 막힌 듯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흰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흐트러진, 눈가가 붉어지고 물기 어린 청회색 눈을 응시하며 카인은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들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실패를 저질렀으며, 유일하게 모든 것을 바로잡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때 세실이 시선을 약간 올려 카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로 직전까지 침대 헤드를 받치고 있던 손이 올라와 카인의 목을 감싸안고 천천히 끌어당겼다.


"카인,"


조금 전 그를 달래기 위해 온전히 거짓으로 입에 올렸던 단어가, 메아리처럼 세실의 입을 통해 되돌아왔다.


"괜찮아…"


반쯤 울음이 섞여 탁해진 목소리로, 세실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행위에 대한 허락인지 혹은 그의 태도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감지한 것인지 몰랐지만, 카인은 차마 그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몸이 굳어지고 머릿속까지 저릿해지는 기분은 행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카인은 숨을 한 번 삼켰다. 대답 대신,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세실의 몸을 일으키고, 삽입한 채 그대로 안아올렸다. 상반신을 침대 뒤의 벽에 기대게 하고 두 손으로 둔부를 받쳤다. 세실이 지탱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카인의 몸밖에 없었기에 자연히 카인의 목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무게를 의지하게 되었다.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댄 채로 카인은 아래에서 위로 찍어올리듯 허릿짓을 시작했다. 먼젓번보다 더욱 깊숙이 관통당하는 자세에 세실이 경련하듯 떨었다. 이를 악물고 허리를 위로 솟구칠 때마다 굳은살 박힌 손이 애원하듯 더 강하게 붙잡아왔다.


"으윽! 아흐, 읏! 흐…으읏..!"


세실의 목소리가 신음에서 새된 비명에 가까워지고, 뒤로 한껏 휘어진 몸이 품안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것을 느꼈다. 도망칠 수 없도록 그를 침대 헤드에 밀어붙인 채로 카인은 마지막으로 허릿짓에 박차를 가했다. 세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기 위해, 그리고 두려움을 잊기 위해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전율감,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은 감각에 몸을 맡겼다. 끝을 갈구하는 동시에 끝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의 숨결 안에서 한계에 몰린 신음이 엉망으로 터져나왔다.


"카인, 하으! 끄, 으읏…! 제발… 카인…! 흣, 아흐윽! 흐,아아…!"
"읏, 큭…! 후우, 세, 실…! 흐윽, 아-!"


어느 순간 그를 감싼 내벽이 수축하며 품 안의 몸이 튕겨져나가듯 크게 경련했다. 배 앞이 축축이 젖어드는 감각, 바르르 조여드는 근육의 압박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 자극을 더 견디지 못한 카인 역시 세실의 안에 길게 파정했다. 모든 감각이 폭발하는 사이 카인은 세실에게 다시 키스했다. 맞닿은 채 한참을 움찔거리며 쾌락에 떨던 몸이 조금씩 진정되어가고, 한차례 지나간 쾌감의 여파로 품 안에 늘어지는 동안에도 그는 세실의 입안을 탐하는 데 집중했고, 두 입술이 정신없이 맞닿으며 타액으로 젖은 여린 살끼리 휘감겼다. 세실의 섬세한 속눈썹이 닫힌 채로 떨리며 눈가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목을 감싸 안은 손이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껴안아왔다. 정액의 냄새와 라벤더향, 땀과 살의 내음이 뒤엉키는 혼탁한 공기 속에서 카인은 입맞춤을 이어나가며 왼손을 옆으로 뻗었다. 보지 않아도 정확한 위치를 기억해놓은 장소에 차가운 힐트의 감촉이 잡혀왔다. 칼자루를 쥔 손이 헛손질하거나 표적을 제대로 찾지 못하거나 혹은 세실이 눈을 뜨고 제때 알아차리기를 바랐지만 그 어느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단련된 손은 수도 없이 그려온 궤적을 따라 무방비한 벗의 심장으로 향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직전 카인은 표정을 닫았다.


입술이 떨어지며 세실의 눈이 크게 열렸다.


자루까지 박아 넣은 단도가 덥게 젖어들었다.



* * *



무너지는 몸을 침대 머리맡에 의지한 채 헛숨을 들이켰다.


체온이 떨어져나간 자리, 벗의 온기가 사라진 그 자리에, 서늘한 기운이 어느 때보다 선명한 형태로 찾아들었다. 세실은 자신의 가슴 위를 더듬었다. 몸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던 손. 카인의 손이,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검의 손잡이를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 언제나 매여 있던 단검이었다.


카인은 물러나기 전, 더 힘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던 손에 한차례 더 힘을 주었다. 깊숙이 박힌 칼날이 상처를 비집어 열었고, 튀어오른 핏방울이 건너편에서 그늘을 드리운 친우의 가슴까지 어지러운 흔적을 남겼다.


"아, 허억…!"


비명이 역류하는 피와 함께 목 안에서 끓어올랐다. 한 발 늦은 통증이 찢긴 피부를, 구멍난 심장과 끊어진 혈관들을 타고 불길처럼 번졌다. 세실은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미약한 저항을 시도했다. 피로 흥건한 손이 새파랗게 질린 카인의 손등에 어두운 색을 입히며 자꾸만 미끄러졌고, 폼멜의 정교한 세공 사이사이 핏방울이 검붉은 빛으로 스며들었다. 


단 둘 뿐인 방에서, 세실 혼자만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피어난 이미지들이 눈앞을 가득 메운 탓이었다. 잊어버린 채 내버려두었던 기억들이, 피가 빠져나간 빈자리에 파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세실은 마침내 그들이, 카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벗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던 몸의 상처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턱 아래로 창끝이 드리우던 순간을, 벗이 저를 땅으로 밀쳐내던, 가슴 위로 내쳐지는 손길을 기억해냈다. 세실은 이제야 카인과 골베자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실은 어째서 그의 검이, 카인이 그토록 두려워했음에도, 끝내 자신의 심장을 꿰뚫었는지 만큼은 알 수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질문을 찾았으나 답을 일러주어야 할 벗은 그에게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저 멈추어 있었다. 완전히 닫힌 표정에서는 줄곧 넘실거리던 감정들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어, 째서…”


왜 진작 멈추지 못했나.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세실도, 그리고 아마 카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슴에 박아넣어진 검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기에, 세실은 마침내 돌이킬 수조차 없는 실패와 대면하고 있었다. 식어가는 몸을 덥히는 핏물이 다 흐르고 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으며, 세실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감기고 나면 무엇이 오는지, 카인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세실은 알지 못했다. 달에서 밀담을 나눈 두 남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의 계획을 어리석은 동향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간신히 거머쥔 기억, 끝내 맞춰진 조각들은 의식과 함께 손아귀를 빠져나가 허망하게도 흩어지고 있었다. 두 손에, 가슴 위에, 실핏줄에 젖어든 시야가 온통 붉게 타들어갔다. 더 이상 멀지 않은 기억 속, 수없이 그를 따라다닌 흔적들이었다. 


여전히 세실 혼자만, 모든 흔적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지독하게 차가웠다. 이를 악문 채, 굳게 닫힌 카인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힘겹게 이어가던 저항을 멈춘 채, 세실은 고개를 들고 결코 눈앞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간신히 마주보았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죽어가는 이의 눈에 비친 착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실은 그 환영 같은 균열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찰나에 불과한 고통스러운 일그러짐 때문에 세실은 스스로 구하려던 모든 질문들을 다시 한 번 지워버렸다.


그저 남은 것은, 홀로 남을 벗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카, 인… 나를, 나를… 봐…"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가슴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호흡이 갈라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잘게 쏟아내며 세실은 끝내 카인의 체온에 매달렸다. 


할 수 있다면, 묻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도록 둘 수밖에 없었던 나를 용서해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었는지. 기억의 파편들과 씨름하는 자신을 보며, 그토록 부족했기에, 결국 알 수 없는 그 계획에서 나를 빼버렸던 것인지.


"혼자가, 되지 마… 절대로… 너 혼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 때, 섣불리 네가 죽었다 판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던가, 너를 믿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후회들. 진실로, 둘도 없는 친우인 너를 지나치게 신뢰했기에, 오히려 네가 홀로 싸우다 무너져가는 것을 외면했다고.


그러니 나 역시, 너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새하얀 손이 여즉 미련이 남아 벗의 어깨를 붙들었다. 뺨을 어루만지려 뻗은 손끝에 핏자욱이 짙게 번져, 맨살과 금빛 머리칼에 갈라져 떨어지는 흔적을 길게 남겼다.


"나는… 그저, 너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함께 싸우고, 그리고,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입 언저리에서만 맴돌던 말들이, 한차례 기침을 하자 피거품과 함께 모조리 씻겨 사라졌다. 기능을 잃은 폐부를 타고 통증이 다시 찾아들자, 애써 마주하던 눈빛이 발작과 함께 흐트러졌다. 뒤로 기울어진 몸이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울어 늘어졌을 때, 세실은 더 이상 스스로의 몸을 가눌 수 없음을 깨달았다.


뒤집혀 비껴나간 시선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기침이 거친 호흡이 되고, 이내 실낱같은 숨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헐떡이던 가슴의 들썩임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쌕쌕 가쁘게 이어지다 끊어진 호흡 뒤로 폐 속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긴 숨이 따라붙었다. 고여 있던 핏물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고,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이 어느 순간 열리지 않았다. 뺨 위의 눈물도 긴 자욱만을 남긴 채 말라버리자, 마침내 세실의 몸이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벗의 목소리가 사그라진 자리에는 적막만이 있었다.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가운데 스스로의 맥박만이 귓가에서 쿵쿵 요동쳤다.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자꾸만 목끝까지 막혀와 억지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온통 얼얼한 감각들 속에 단 하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은 갑작스레 닥쳐온 싸늘한 냉기였다. 임무가 끝났음을 깨닫고서야 힘을 잃은 손에서 단도가 빠져나갔다. 완벽한 정적이 잠깐 깨지고, 시트 위로 붉은 자국을 그리며 미끄러져 마룻바닥에 떨어진 단도가 나무를 긁으며 두어 번 회전하다 멈췄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천천히, 카인은 벗의 시체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머무른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일어서고, 마룻바닥의 옷가지를 도로 주워 입고, 계획을 생각했다. 이것으로 세실이 이미테이션에게 쓰러져 소멸을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인이 이번 전쟁의 끝을 보는 동안, 세실은 모든 고통스런 배신의 기억을 신룡에게 바쳐 잊은 채로 안전하게 다음 전쟁에서 깨어날 것이다. 이제 어서 그의 몸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고, 남은 동료들의 동선을 점검하고, 전황을 파악하고,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효율적인 경로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실."


그러니 카인은 자신의 입술이 왜 멋대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주저하는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고, 동료 전사들을 모두 구해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들여 세운 계획은 잔인한 만큼이나 명확했다. 나아갈 시간이었다. 나아가야만 했다. 그는.


"세실."


그러나 그를 다음 임무로 데려가야 할 다리는 여전히 미동하지 않은 채, 오히려 힘을 잃어갔다.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해도 떨림이 멎지 않고, 찬 힐트와 뜨거운 피의 감촉이 손바닥 밑에 새겨진 듯 생생했다. 카인은 문득 세실의 얼굴에 못 박힌 시선을 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식이 허물어지고 눈이 감기기 직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날붙이가 심장을 꿰뚫고 오래간 이어온 신뢰가 자신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번에야말로 후회하거나, 그를 속인 배신자를 원망했을까? 그러나 정작 그 입에서 나온 것은 저주도 원망도 아닌, 고작 카인이 혼자가 될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너는, 왜."


세실의 온기가 마지막으로 닿았던 뺨에 묻은 액체가 한 방울씩 느리게 떨어지며 침대 시트 위에 부딪쳤다. 널브러진 단도에서도 피가 떨어져 나무 바닥에 고여 갔다. 자신이 낸 피를 모조리 뒤집어쓴 카인에 비해 세실의 얼굴은 입가에 피가 흘러내린 자국 외에는 멀끔했다. 말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은 정말로 단지 슬픈 꿈을 꾸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였다. 카인은 다시 한 번 그 얼굴에서 눈길을 거두려 노력했다. 이렇게 멈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성공했다. 오래 전 골베자가 내렸던, 그러나 완수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임무를 마침내 성공시켰으며 마땅히 기뻐해야 할진대 어째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 아니야… 나는, 너를."


세실을 구하기 위해. 그것이 지금까지 카인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새겨온 변명거리였다. 그러나 카인은 이제 와서 도저히 그 말을 진심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실은 전처럼 골베자의 함정에 놀아난 것이 아니었을까, 윤회도, 새로운 기회도 전부 거짓말이고 그때처럼 칠흑의 마도사가 자신의 의지였던 것처럼 속여 숙적의 숨통을 끊은 것이 아닐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용해 조종한 것이 아닐까. 윤회, 정화, 부활, 다음 전쟁, 관념뿐인 단어들을 되풀이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혼탁해져 웅웅거렸다. 애초에 그것들이 전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스로를 속이려 한들 눈앞에는 오직 피로 묻은 제 손과, 그 손으로 꿰뚫은 벗의 몸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 그것만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일어나야 했으나, 일어날 힘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영원히 눈꺼풀 밑에 새겨져 남아 있을 것만 같은, 피웅덩이에 삼켜져 잠든 세실의 실루엣이 점차 흐릿해져갔다. 어느 새 바닥이 가까워져 있었고 마룻바닥에 고인 아직 더운 피가 무릎께로 젖어들었다. 그제야 카인은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정해진 말로였으며, 자신이 오래 전부터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길이었다. 그때는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닌지도 몰랐다. 시험해보지 못한 다른 가능성들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결국 친구를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오랜 악몽들에서 수없이 봐 왔던 길이었기에 더욱 익숙하게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실은 마지막까지 그런 카인을 원망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것이 늘 카인의 숨통을 조여 오는 요인이었다. 어쩌면 세실은 죽음을 앞두고도 저를 죽인 친구의 안위를 걱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벗이 또다시 자신을 떠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해 모든 걸 제 탓으로 돌려버릴 정도로 유약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 카인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더는 유의미한 판단을 할 능력을 잃어버린 채로도 끅끅거리며 터져 나오는 숨 사이로 목끝까지 차오르는, 유일하게 떠오르는 한 마디가 있었다. 카인은 입을 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짓씹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짓눌러 없애고, 세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말을 끝까지 억눌렀다.


그에게는 용서를 빌 자격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다.


코를 찌를 정도로 점점 더 지독해지는 피비린내가 있었다. 뚝, 뚝, 하고 마룻바닥에 고여드는 핏방울의 소리는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소리이자, 가야 할 길을 다시금 가리켜주는 이정표였다. 카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훔쳐냈다. 눈가에 흥건한 눈물을, 온기가 닿았던 뺨에 남은 핏자국을 함께 지웠다.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동물의 숨통을 꿰뚫었던 것과 똑같이 친우의 심장을 꿰뚫은 단도를 주워들어 시트에 닦았다. 서슬 퍼런 날이 칼집 안으로 사라졌다.


세실의 몸을, 정확히는 자신이 찌른 자국을 도저히 바로 볼 수 없었기에, 몸 위에 흥건한 피를 대충 닦아내고 그에게 옷을 입혔다. 마치 경건한 장례의식을 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카인에게 세실의 장례를 치러줄 자격은 없었지만, 그의 죽음을 알아줄 사람도 자신뿐이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손길대로 늘어지는 몸을 흰 무명으로 감싸며, 카인은 세실의 입이 마지막으로 움직였을 때 채 나오지 못하고 끊겼던 뒷말을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리 낀 창밖을 무심코 보니 어느 새 눈이 그쳐 있었다. 여전히 추위와 어둠에 삼켜진 마을이었지만, 이제 눈밭을 헤치며 걷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카인은 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다시 한 번 갑주로 스스로를 감싸고, 재를 뿌려 벽난로의 불을 끄고, 남은 식량을 들고 갈 수 있는 만큼 싸고, 등 뒤에 창을 멨다. 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이런 날씨에 구태여 이동하는 것을 택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의 그는 세실과 함께 이 집에 한 시라도 더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서서히, 남은 온기조차 사라져가는 벗의 몸을 두 손으로 안아 올렸다. 성기사의 갑주로 가리지 않은 세실의 몸은 가벼웠다. 작은 오두막의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온 몸에 부딪쳐왔다. 문 밖으로 나서기 직전, 카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독하게 혼자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형벌이리라.


한 걸음을 내딛었다. 두 걸음, 세 걸음, 어둠 속에 환히 빛나는 땅에 무거운 발자국이 거듭 찍혔다. 자신을 땅끝까지 끌고 들어갈 무게를 양 손으로 지탱한 채로 카인 하이윈드는 눈 속을 걸었다. 멈추는 것도, 쓰러지는 것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었다. 이 길이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 쉬지 않고 걸어가리라는 사실만을 알았다. 그 희끄무레한 무게가 그를 끝없이 짓누르는 이상은 결코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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