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4TA/세오카인] 바론왕자의 진로고민
사실 고민 다 끝내고 온 듯
파판4 달의귀환 스포일러
평화의 시대가 길어지면 군인이 활약할 자리는 없어지기 마련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이삼 년 전만 해도 바론의 어린 기사들은 임금의 무훈과 영웅담을 입에 올리며, 내심 공을 세울 수 있는 전쟁이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어린 소망을 떠들었다. 오래 전 이 땅을 휩쓸고 간 전란을 조금이라도 기억할 정도로 뼈가 굵은 자들은 그것을 마땅히 다행으로 여겼으나,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했고 비극은 점점 잊혀져갔다.
마이너스의 재해가 푸른 별을 또 한 차례 뒤엎고 지나간 후 바론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자의 혹은 타의로 은퇴해 성을 떠났다. 정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아 눈만 뜨고 살아있는 환자들도 속출했다. 후유증이 비교적 양호한 자들은 성에 남았으나, 그 시기를 화제삼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다. 국왕의 명령 아래 군대가 축소되고 재편되는 동안 누구도 반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물들이 성을 습격한 그 날 바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비로소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안팎으로 침범당한 바론이 조금씩 본래의 일상을 되찾으며 회복해가는 동안, 붉은 날개 부대장 카인 하이윈드의 하루 일과는 단조로웠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새벽훈련을 마치고, 몸을 씻고 흰 갑주를 차려 입었다. 아침식사 후 필요한 날에는 국왕에게 보고를 했고, 그렇지 않다면 곧바로 연무장으로 돌아가 부하들의 훈련을 진행했다. 직접 상대를 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다른 부대의 병사들까지 구경을 한답시고 연무장 주위에 꾸역꾸역 몰려들어 분위기를 흐트려놓았기에 대부분은 참관에 그쳤다. 세부사항은 매일 달라졌으나 붉은 날개의 임무들은 대체로 바론 안팎을 재건하고 정기적으로 각국에 지원물자를 나르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몇 주씩 다른 나라에 원정을 나가지 않을 때는 비공정을 점검하거나 시험 비행을 하고, 필요한 경우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저녁에는 모든 병사들을 집합시켜 각자의 임무와 불침번을 점검하고, 그 후에 집무실로 돌아와 그날 남은 서류들을 처리했다.
카인은 서류 업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일에 소홀할 정도로 녹슬어 있지는 않았다. 다음 주에 파불 성에 운송할 물자의 종류와 양을 기록한 보고서를 확인하고, 시드가 보낸 새 비전투 비공정의 설계를 검토하며 몇 가지 방어적 취약점을 찾아낸 후, 내일 아침 국왕에게 전해져야 할 서류들을 한 곳으로 모아놓자 모든 일이 끝났다. 마침내 집무실을 나왔을 때, 카인은 복도 끝에 익숙한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을 보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왕족이 아닌 군 지휘관이라면 왕족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옳았으나, 카인은 사석에서는 국왕과 왕비에게도 막역하게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자연히 그 아들에게도 부하 군인 대하듯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다. 기둥 뒤에서 쭈뼛쭈뼛 기어나오는 열일곱 살 소년 역시 왕자라기보다는 신입 기사의 태도에 가까웠다. 지난 훈련에서 뭘 하다 다친 것인지 그는 살짝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였다. 몇 달 사이에 키가 훌쩍 자라 제법 눈높이가 올라온 파란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바쁘십니까, 대장님?"
근래 들어 카인은 세오도어의 화법을 종류별로 익혀가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표정으로 삼가는 말투를 쓸 때는 무언가 하고 싶은 중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카인은 눈썹을 한 번 들어올리고, 닫아놓았던 집무실 문을 도로 열어젖혔다.
"들어와라."
세오도어는 이전에도 카인의 집무실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온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왕자는 핏줄의 권력을 휘두르는 법을 몰랐다. 아버지인 왕부터가 핏줄과 무관하게 공만으로 왕이 된 사례이니만큼 일부러라도 담백하게 보일 필요가 있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 세오도어는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조심스럽고 소심한 본성은 로자보다는 세실에게서 이어받은 것이었고 카인은 훈련중이 아닌 사석에서는 그의 기사답지 못함을 참아넘겨 줄 수 있을 만큼 그런 태도에 익숙했다.
그렇다 해도 삼 분째 침묵을 지키는 것은 퇴근을 앞둔 카인의 인내심을 슬슬 건드리고 있었다.
"동이 틀 때까지 서 있을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그게..."
이제 세오도어는 울상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카인은 웃음을 참았다. 세오도어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정말로 열일곱 적의 세실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주저하던 세오도어가 네 번째로 입을 열려다가 도로 닫아버리고,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 자세를 곧게 하고, 큰숨을 들이킨 후 입을 여는 과정을 지켜보며 카인은 짐짓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말이 떨어진 후에는 평정을 지킬 수가 없었다.
"용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한동안 변성기 때문에 고생하던 세오도어의 목소리는 이제 자리잡혀 엷고 부드러운 색을 띄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말투는 각이 잡혀 제법 군인의 태가 났다.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꺼낼 것이라 예상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었다.
"용기사는 이제 없어."
카인이 시련의 산으로 떠난 후 용기사단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구심점이 사라진 탓이기도 했고,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칠흑의 마도사가 떠난 후 바론 성내의 풍경은 지금과 비슷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크고 작은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무기력증에 빠졌고 용기사단도 자유롭지 못했다. 병사들이 입을 다물었기에 세간에는 국왕 본인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즉, 긍지 높은 바론의 마지막 용기사단장은 오랜 친우였던 지금의 국왕 옆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스스로의 무력함을 통감하여 훈련하기 위해 시련의 산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보다 회의적인 사람들은 카인이 국왕과 반목하여 바론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했다. 세실이 임무 중에 행방불명되고 카인이 골베자의 휘하에 있었던 잠깐의 시기를 기억하는 소수는 사실 카인이 변절하였으며, 세실이 옛 친구의 명예를 지켜주는 조건으로 카인을 바론에서 추방했다고 믿기도 했다. 용기사단장 역시도 주술에 걸려 있었다더라, 그게 아니라 칠흑의 마도사에게 일격을 날리기 위해 주술에 걸린 척만 했다더라, 실은 큰 부상을 입어 왕의 옆에 더 있지 못하게 되었다더라, 선왕을 지켜내지 못한 용기사단에 실망해서 떠났다더라 등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소문들은 세월이 지나며 사그라들었고, 카인이 바론으로 돌아오기 직전 즈음 되었을 때는 지금은 사라진 옛 용기사가 시련의 산을 떠돌며 훈련하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 남았다.
그리하여 진상 - 카인은 주술에 걸린 게 맞지만 빠져나온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으며, 친구를 배신한 수치를 견디지 못해 시련의 산으로 도망쳤다는 것 - 은 끝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에서 전해들은 대로 이야기의 첫 번째 버전밖에 알지 못하는 젊은 왕자의 입에서는 즉답이 나왔다.
"대장님이 있잖아요."
하이윈드의 이름을 걸고 자신만큼 용기사단의 명예에 먹칠을 한 자가 있을까. 그런 점을 구태여 설명하는 대신,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용기사단이 어째서 와해되었는지 알고 있나? 네가 태어나기 전의 그 사건이 시기를 앞당기기는 했지.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비룡이 없기 때문이다."
"...들은 적 있어요. 용기사단의 마지막 비룡은..."
"그래, 내 대에 끊겼지."
카인이 용기사단장이 되기 이전부터 바론은 비룡의 개체수 조절에 몇 대째 난항을 겪었다. 더는 비룡을 사용할 수 없어진 용기사단은 왕성 경비로 밀려나고, 비공정단 붉은 날개가 바론의 주력 공군부대가 되었다. 세오도어 역시 붉은 날개의 일원인만큼 이 역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장님은 비룡 없이 싸우는 법을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카인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감동이라도 받아야 하나?"
"저는 대장님의, 아니, 카인 씨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점입가경이었다. 세오도어의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해 보였기에 카인은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실은 헛바람을 넣어준 것에는 카인의 책임도 있었다. 마이너스의 달에서 유달리 움직임이 빠른 마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도약법의 기초 중 기초를 조금 가르쳐준 것이 화근이었다. 평균 십오 년은 족히 훈련해야 비룡과 합을 맞출 정도가 되는 기술을, 용기사를 모르는 세대의 세오도어가 바로 모방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카인이 예상한 효과는 기껏해야 마물의 발이나 꼬리를 피할 정도로 뛰어오르고 발에 탄력을 붙여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검술과 어머니의 백마법의 재능을 물려받은 세오도어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몇 년의 기초 훈련의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었다. 발돋움하기 직전 스스로에게 가벼운 레비테트를 걸어 순간적으로 저항력을 최소화한 것이다. 오랫동안 군사국가였던 바론에 마법을 경시하는 풍조는 아직 남아있었고, 검과 창을 쓰는 병사들은 마법을 훈련하지 않았다. 옛 용기사들 중에서도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는 없었으며, 심지어 클루야에게 백마법의 힘을 부여받은 카인도 그 같은 응용방법은 떠올리지조차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오도어는 바론 최초라고 할 만했다. 달의 표면에서 지하로, 심층부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시시각각 실전경험을 키워가며 성장했다. 정확도는 떨어질 지 몰라도 높이로만 보면 이미 견습 용기사 수준에 근접하게 점프할 수 있었다.
다만 카인은 어린 기사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성격이 아니었다.
"너는 너무 늦었어. 중력을 거스르고 대기를 뚫는 기술이다. 보통은 늦어도 열 살 이전에 기초훈련을 시작하며 창술을 먼저 배우고, 비룡과 합을 맞추며 감각을 익히지. 네 훈련을 도울 비룡은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저는 백마법으로-"
"마도사의 마력은 전사의 체력 이상으로 한계가 확실하다. 도약할 때마다 마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나중으로 갈수록 큰 약점이 될 수 있어."
세오도어가 입술을 깨물었다. 가혹한 평가였지만 진실이기도 했다. 카인은 그쯤에서 쐐기를 박기로 판단했다.
"그럼, 내가 한참 때 늦은 지망생을 데리고, 불확실한 가능성에 걸면서까지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있습니다."
정말로 설득할 수 있다는 기색이었다. 세오도어는 숨을 한 번 들이키고, 약간 긴장한 채로, 그러나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저는 미시디아에서부터 지금은 떠난 달에 이르기까지 카인 씨의 전투를 옆에서 수없이 지켜봤고 실전에서 합을 맞춰본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어린 기사들은 용기사의 전투를 본 경험이 없을 테지만요."
그는 제법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온 모양이었다. 제안의 실용성과는 별개로, 한번 말문이 터지자 멈춤이 없었다. 카인은 계속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두 번째는, 백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전장에서 큰 장점입니다. 치료병 없이 혼자 운신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사의 기동력과도 잘 어울리죠."
여기까지는 카인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세오도어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그의 확신에 찬 대답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둘 다 내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엔 부족하군. 애초에 내가 왜 제자 같은 걸 들여야 하지?"
그러자 즉답이 떨어졌다.
"용기사단의 명맥을 잇고 싶어하시잖아요."
카인은 이번에는 정말로 코웃음쳤다. 정곡을 찔린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로자 파렐의 아들을 너무 얕봤던 것일까.
"그건 네 생각인가? 아니면 누군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옛날에 용기사단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고 들었어요."
카인은 그 말에 잠깐 세오도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오도어 쪽에서도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이 카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꿰뚫어보는 눈빛이 정말로 로자와 판박이였기에 카인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바론으로 돌아오고 나서 카인은 붉은 날개 부대장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 단순히 직위에 불과한 그 명칭으로 불릴 때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함을 느꼈으나,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용기사였다. 시련의 산으로 떠난 후에도, 돌아와 다른 임무를 맡게 된 후에도, 카인은 스스로를 용기사로 여기는 것을 멈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오도어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통찰력이 뛰어난 것인지, 혹은 열일곱 살 소년에게마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자신이 한심하게 흘리고 다녔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 미스트에서 모든 것이 바뀌지만 않았더라도 카인은 용기사단이 비룡 없이도 독립적인 부대로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젊고 치기어린 시절이었다. 부대 하나를 이끌기는커녕 제 마음 하나도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그릇이 작다는 것을 깨닫기 전이었다. 친구들의 결혼식을 뒤로 하고 산으로 떠날 때 카인은 용기사단에 대한 문제에서도 함께 도망쳤다. 당시에는 오로지 제게 걸맞지 않는 책임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때의 균열이 카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이제 세오도어도 알았다. 그 역시 흑갑의 용기사가 제 어머니를 잡아끌며 아버지를 저주했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 카인은 붉은 날개 부대장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받아들였고, 적응하고자 했다. 세실이 두어 번인가 용기사단에 대해 운을 뗀 적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그리 적은 나이가 아니었고, 이제 와 용기사단을 재건한다 해도 비공정이 존재하는 지금의 바론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알지 못했다. 실은 카인 자신도 본격적으로 비룡을 타고 싸우지 못한 세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변화에 저항하지 않고 붉은 날개에 올랐다. 바론이 겪은 모든 풍파에 비하면 개인적인 안타까움 정도는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카인은 비공정을 싫어하지 않았으나, 홀로 도약할 줄 모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비공정에 올라 엔진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기반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묘한 허망함이 한 번씩 찾아오고는 했다.
어쨌든, 리차드 하이윈드의 유지가 담긴 곳이었다.
"비룡과 함께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지금의 기사들은 백병전에서는 여전히 옛 용기사단을 따라갈 수 없다고들 합니다. 비룡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바론에도, 카인 씨에게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때마침 세오도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카인이 스무 해 전쯤에 했던 고민을 줄줄 읊고 있었다. 카인은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용기사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말하는군."
잠시 후 그는 세오도어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다리를 다쳤던 것도 그 때문이냐?"
움찔. 잠깐의 침묵은 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내 세오도어는 변명하듯이 줄줄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어요. 조금 더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은 것뿐입니다."
"시전 직전의 틈은? 내가 모든 전장에서 널 엄호해줄 수는 없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더 익숙해진다면, 도약까지 일 초도 채 걸리지 않을 거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력만으로 뛰어오르는 속도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또한 용기사들은 하늘에서 싸우기에 특화된 창술을 배우지. 너는 기초가 되는 창술이 너무 부족해."
"그건..."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쌓아놓은 서류들을 손으로 한 번 훑었다.
"세오도어. 공중전이라는 건 생각보다 큰 위험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너는 아직 추락해서 심하게 다쳐본 경험이 없지. 다리를 다치는 수준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어."
"다시 날아오르면 되잖아요."
"다음 기회는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어."
스스로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씁쓸해지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건 용기사단의 문제를 넘어서, 자신의 문제였다. 자신이 세실과 로자의 아들을 자칫 잘못된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세월이 흐르고 자신 안의 가장 큰 갈등을 일단락지은 후에도 카인은 여전히 실패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세오도어는 결단을 내린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되더라도 저의 선택입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벽 같았다. 어디까지 잃을 수 있는지 잃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결코 호기심을 놓지 않는 것이 그 나잇대의 특성이었다.
카인은 왕족이자 달의 자손인 세오도어가 눈앞에 열려 있는 수많은 안전한 기회들을 잡고, 그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평탄한 길을 가기를 바랐다. 아직 젊은 그가 다 사라져가는 옛 전통에 발목잡히지 않았으면 했고, 무엇보다 카인 자신의 전철만은 결코 밟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만약 세오도어가 진정으로 그 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세실이나 로자도, 카인조차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차라리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너무 크게 다치지 않게, 혹은 엇나가지 않게 잡아주는 쪽이 전략적으로도 합당하지 않은가.
잠시 후 카인은 얼굴을 풀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여러 무기를 배워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세오도어에겐 세실이 검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검을 배우는 그를 자신이 따로 이끌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잠깐 떠올랐다. 그러나 검과 창을 동시에 배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든, 그것은 온전히 세오도어가 감당할 문제였다. 아들의 일탈을 알게 된 세실이 받을 충격은, 뭐, 그 놈이 알아서 하라지. 자신과 세실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고려할 때 카인은 이제 그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카인의 빠른 계산을 알 턱 없는 세오도어는 오로지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희망에 찬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창술만이다. 창에 재능이 없는 자를 용기사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제자니 하는 문제는 네 실력이 쓸만하면 고려해보겠다. 그 때까지는 오로지 지상에서만 훈련한다."
눈앞의 사람이 세오도어가 아니었더라면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다. 얼굴에 실실 떠오르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어왔다.
"그럼 그 전까지 혼자 점프를 연습하는 것도 금지하실 건가요?"
"금지하면 따를 거냐?"
왕자는 잠깐 망설였다가 금방 물론입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그 망설임에서 탈락이었다. 그는 거짓말에도 서툴렀다. 카인은 세오도어의 그런 면을 좋아했지만, 전장에서는 약점이 되기에 딱 좋았다. 감정을 숨기는 법도 훈련에 확실히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카인은 적당히 한 손을 내저었다.
"그건 조금 생각해 보고... 우선 다리가 나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라. 시기도 한참 늦었고 갈 길도 머니, 앞으로의 훈련은 지금껏 네가 겪은 그 어떤 훈련보다도 몇 배로 고될 거다. 그때까지 확실히 휴식을 취해 놓도록 해. 명령이다."
"네!"
마지막 말에 화들짝 놀라 각 잡힌 경례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젊은 기사였다. 그 얼굴이 용기사의 투구로 가려질 모습을 잠깐 가늠해보던 카인은 곧 손을 들어 경례를 물렸다. 달의 피가 섞인 고운 선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새어들었다.
"저, 반드시 카인 씨의 첫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머리가 아프군. 남은 일에 방해되니 어서 나가 봐라."
"네!"
두 번째 대답은 한결 가벼웠고, 세오도어의 돌아가는 발걸음은 성의 가장 높은 첨탑까지도 뛰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카인은 일거리가 남아있을 리 없는 책상을 한 번 쳐다보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그는 단단히 귀찮은 일에 말려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