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B 엔딩 - 카인
듀오데심 기반 극시리어스 2차커뮤에서 썼던 엔딩로그 카인편
상황설명: 프리오닐이랑 쩌서깊관 쌓았는데 프리오닐은 죽고 아쉐랑 둘이서 신룡전 하러 갔음 공평하게 소멸엔딩이지만 기적을 받지 못해 고통스럽게 죽어간 파괴 루트.

게이트웨이를 통과하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꽃향기였다. 그들이 뒤로 하고 온 라바나스타의 석양이 거짓말이었던 양, 푸른 하늘 아래로 광활한 꽃밭이 펼쳐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어둠에도 영향받지 않는 꿈 속의 들판이었다. 절망뿐인 세계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운 풍경에 살아남은 두 전사는 말을 잃었다. 흰 꽃잎이 날아와 뺨을 간지럽히고, 그들은 라바나스타의 어둠에 묻힌 동료를 떠올렸다.
하늘 한가운데에는 윤회를 지배하는 용이 고요하게 빛났다.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자,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진 하얀 빛조각들이 들판 위로 올라와 금빛 몸체로 흡수되었다. 윤회가 끝나고 시작될 때마다 스러져간 전사들의 기억을 먹고 자란 용에게선 감히 신들조차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벌레들처럼, 수많은 이미테이션들이 윤회의 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쩍, 황금색 빛이 세상을 비추었다. 의지 없는 인형들이 쓰러지고 그 뒤로 새 인형들이 달려들기를 반복했다. 꽃들이 짓밟히고 꽃잎들이 나풀거리며 하늘을 수놓았다.
소멸하는 인형들 사이로 감히 자신에게 대적해 온 두 의지를 인식한 신룡이 낮게 울었다. 희생을 딛고 일어나 세상의 끝을 목도한 두 명의 전사는 마침내 최후의 싸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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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랄 것도 없었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전사들을 희망으로 기만하고 절망에 추락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조롱이었으니까.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그는 꽃들을 짓밟고 날아올랐다. 바론보다 옅은 색의 하늘을 찢고 솟구쳐 거대한 용의 머리를 노렸다. 공중에서 창을 두 손으로 고쳐잡고, 동료가 날려보낸 검기 위로 그대로 내리꽂았다.
창끝이 표적과 충돌한 순간 카인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힘을 다해 찔러넣은 무기가 용의 몸체를 감싼 얇은 막에 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팔을 타고 얕게 퍼져나오는 충격파에 멈칫한 사이 용이 입을 열었다. 수십 개의 빛나는 원들이 전방의 하늘을 가득 채웠다. 원에서 뿜어나온 가늘고 흰 빛줄기들이 앞으로 퍼져나가며 대기를 휩쓸었다.
피할 사이도 없이 그는 공중에서 참격을 맞았다. 팔을, 가슴을, 허벅지를 관통당했다. 고통으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부서지는 크리스탈 조각들이 보호구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과 손에 생채기를 냈다. 하늘이 멀어졌다.
피비린내도 사방의 꽃내음을 가리진 못했다. 몸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부서졌는지 구분가지 않았다. 시야가 가려진 채 그는 풀밭을 기며 피를 토해냈다. 비뚤어진 투구의 깨진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와 갑자기 눈이 부셨다. 향기와 풀내음으로 가득한 들판이 그를 자꾸만 밑으로 끌어당겼다.
얼마 남지 않은 이미테이션들이 죽음으로 돌진하는 광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카인은 창으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섰다. 꽃밭이 충격을 줄여주지 않았더라면 즉사하거나, 뼈가 몇 개는 부러졌을 것이다. 빛줄기에 정면으로 관통당한 오른팔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 외의 부위들은 피를 흘리고 근육이 찢어졌을지언정 움직일 수 있었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내상뿐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꽃 속에 파묻힌 백금발이 있었다. 땅에 검을 꽂아넣은 왕녀가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방어능력이 부족한 옷이 군데군데 피로 물들었지만, 방금과 같은 공격 앞에서는 갑주든 천옷이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쉐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갑주도 없는 가벼운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그는 약해져 있었다.
"놈의..."
목구멍에 차오른 피거품을 뱉어내고 말을 이었다.
"놈의 보호막을 부수는 것이 우선이다."
그건 작전조차도 되지 못했다. 이미 승산은 없었다. 그저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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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을 타고 흐르는 치유 마법의 힘이 몸을 데우고, 상처들이 아물어지고 닫혔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지체하지 않고 아쉐의 지시에 따랐다. 동료가 벌어준 틈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다시 도약하자마자 거대한 해일이 대지를 채웠다. 멀어지는 지상에서 아쉐의 소환수가 방어벽을 만드는 것을 확인하고, 신룡의 몸체에서 약한 틈을 찾았다. 머리를 지키는 막은 견고했지만, 심장부에서 조금 다른 균열이 느껴졌다.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용의 심장을 노렸다. 다시 한 번 충격파가 팔을 내달렸지만, 이번엔 달랐다.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창끝에서 흰 불꽃이 튀었다. 바위의 틈새를 부수는 것과 같은 감각에 그는 그대로 창에 힘을 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윽-!"
순간 카인은 다시 한 번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보호막이 깨지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실패한 것인가.
허를 찔린 신룡이 분노하여 울부짖고, 저만의 환수의 힘을 불러올렸다. 여러 줄기의 번개가 땅을 가르기 시작했다. 하강하기 직전 카인은 지상을 살폈다. 그를 하늘로 대피시키고 타이달 웨이브를 정면으로 받아낸 아쉐는 쓰러져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어벽과, 그것을 만들어낸 소환수는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근처에 착지하자마자 아쉐를 향해 달렸다. 들판에 쓰러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왕녀의 몸을 받쳐들고 발돋움하자마자 그들이 있던 곳에 번개줄기가 내리쳤다. 숨 돌릴 새도 없이 이번엔 동그란 얼음 결정들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아쉐를 안고 바닥을 굴러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피했다. 기이한 형태로 얼어붙은 조각들이 허공을 가르며 부서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땅 위에 생겨난 장판에 불길이 일었다. 카인은 이번에만큼은 피해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아쉐의 몸을 자신의 갑주로 덮어 누른 채 카인은 눈을 감았다. 마침내 이프리트의 불꽃이 그들이 딛은 대지를 불태웠다.
"윽, 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악!"
뜨거웠다. 사방이 불타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대한 화염이 덮쳐왔다. 카인은 비명을 지르며 동료의 몸을 더욱 견고하게 껴안았다. 화염이 지나가고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등허리가 땅에 닿은 것만으로도 두 번째 공격에 직격당한 듯 신음성을 토하며 땅을 긁었다.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갑주 안에 반쯤 녹아붙은 피부들이 불탔다. 창을 잡은 손이 그 모양대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비명이 되지 못한 처절한 신음들을 뱉으며 그는 거듭 몸을 뒤틀었다.
신룡의 공격은 오직 표적만을 향하는 것인지, 거짓말처럼 전혀 불타지 않은 꽃들만이 바람에 휘날렸다.
-
"안돼, 아직 보호막이-!"
무방비하게 달려든 아쉐의 검이 보이지 않는 저항에 막혀 충돌했다. 거센 충격으로 손목보호대가 깨져나갔다. 두 팔에 힘줄이 잔뜩 불거지도록 검을 꽉 잡은 왕녀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울부짖었다. 곧 신룡의 날개가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여러 개의 회오리가 대적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지상을 강타했다. 꽃잎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상에서 발이 뜨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두 전사의 몸이 회오리에 휘말려 날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카인은 다시 쓰러져 있었다. 그는 언제나 쓰러져 있었다. 적에게 제대로 된 부상 하나 입히지 못한 채. 죽음을 각오했지만, 이 정도로 가망 없는 싸움일 줄은 몰랐다. 수십 번을 다시 일어나 싸운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반쯤 아문 화상들과 금이 가고 부러진 뼈들이 그를 한 발짝씩 죽음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집중해야만 했다. 다시 일어나야 했다. 그는. 감각 잃은 손이 창의 몸체를 더듬었다. 아직 지탱할 수 있는 두 발로 땅을 딛고 관절에 힘을 주었다. 카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마음을 굳히고, 비척비척 아쉐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검 손잡이에 매달린 반다나가 피에 젖어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 카인을 알아본 아쉐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위태롭게 검을 짚은 채, 다시 한 번 치유의 힘 혹은 환수를 소환하기 위해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는 마력도 얼마 남아 있지 않으리라.
이제 막 케알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핏줄이 파랗게 도드라진 손목을 잡고, 카인은 아쉐의 가슴에 창을 꽂았다.
그를 응시한 눈이 일순 커졌다가, 곧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검붉은 피가 울컥 흘러나와 창을 잡은 손을 적셨다. 마지막 남은 동료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며 카인은 창을 더 깊숙히 박아넣었다. 고통은 길지 않을 것이다. 흐트러지는 의식의 끈을 잡으려 애쓰며 달마스카의 왕녀가 눈으로 물어왔다. 어째서.
"신룡에게 죽으면... 되살아날 수 없어. 하지만, 이렇게는."
세계가 전부 무너져도 신룡이 살아있는 한 윤회는 반복된다. 윤회의 주인과 계속 싸운다면 그것만으로도 윤회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소멸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이 방식으로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운이 좋다면 아쉐는 조화의 성역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그의 동료는 다시 일어나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했다. 카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아쉐는 해낼 수 있었다.
살아남아 희망을 이어나가는 것.
제가 만든 계약에 발목을 잡힌 신룡이 노해 울었다. 윤회의 규칙에 얽힌 생명이 꺼져가는 동안 용의 몸체에서 벌써부터 황금빛 정화의 힘이 조금씩 솟아나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이의 회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찾으리라 예상한 원망 대신, 쉽사리 읽어내기 어려운 감정으로 두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쉐가 입을 열자 입에서 피가 울컥 솟구쳤다. 그 상태로도 그녀는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도, 내게... 그 창을 넘기는 건가..."
동료에게 어떤 무게를 떠넘기는지 카인은 알았다. 프리오닐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기억하지 말아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프리오닐처럼 부탁할 수 없었다. 대신,
"...미안하다."
손이 떨어졌다. 더 이상 보는 것을 멈춘 눈동자 안에는 하늘만 남았다. 스러진 전사들을 다시 전장으로 인도하는 정화의 빛이 왕녀의 몸을 휘감고, 죽은 자의 무게는 작은 빛의 입자들이 되어 꽃밭 위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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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쉐는 살아남으리라. 그 염원을 마지막으로, 카인은 눈앞의 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홀로 마무리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등허리의 화상들과 부러진 갈비뼈가 그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지만 아직 도약할 수 있었고 창을 쥘 수도 있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삶이지만,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찾았다.
하늘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빛줄기들을 옆으로 피했다. 카인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비룡이 날개를 펼치듯 도약해라, 리차드 하이윈드가 그렇게 말한 날은 끝없이 더웠다. 며칠만 지나면 정식으로 작위를 받고 동경하던 용 갑주를 입을 수 있다는 것도 그날만큼은 위안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된 훈련을 불평없이 이겨냈다. 저를 향해 웃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혹시나 칭찬의 말 한 마디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폭죽처럼 터지는 보라색 구들을 피해 공중으로 도약했다. 카인은 바론 성에서의 여름을 떠올렸다. 그와 세실과 로자는 산과 들판을 뛰어다니고 저녁에는 계곡에 발을 담근 채 미래를 이야기했다. 마을 소녀들이 축제를 위한 꽃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세실이 왜 얼굴을 붉히는지 알 수 없었다. 축제날 밤, 카인은 친구들과 떨어졌다. 인파 속에서 둘을 찾을 길이 없어 홀로 집에 돌아갔고, 다음 날 세실의 방에는 모르는 꽃이 놓여 있었다. 그 이후로 카인은 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룡을 감싼 얇은 막 위로 다시 한 번 창을 내리쳤다. 카인은 붉은 날개를 떠올렸다. 아직 어린 부대장을 두고 성내의 사람들이 뭐라 속삭이는지 알았다. 젊은 용기사 둘이 세실과 국왕의 관계에 대한 질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카인은 그들을 일갈했다. 세실에 대한 걱정보다 스스로의 행동에 뿌듯함이 앞섰다. 상상 속 자신의 모습은 친구를 지키는 정의로운 기사였다.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등뒤에서 솟아난 회오리를 창을 돌려 막아냈다. 카인은 조트의 탑을 기억했다. 세실 일행이 탑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밤 내내 로자의 목 위에 매달려 있던 시퍼런 칼날을. 지쳐 잠든 로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잊어버린 긍지와, 자책과, 절박함 같은 것이 흐린 머릿속을 채웠다. 로자를 풀어줄 틈을 엿보는 것을 카이나초가 목격했고, 그날 그의 주인은 주술을 새로 걸어야 했다.
또 한 번의 번개 줄기가 땅에 꽂히고 꽃잎들이 날렸다. 카인은 프리오닐을 생각했다. 낯선 세계에서 찾은 평화의 시간들. 그의 미소. 고향을 이야기하던 목소리. 널 구원하겠노라고 울부짖던 얼굴. 호숫가에서의 저녁. 이 세계는 그런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없었던 듯 어둠 속으로 지워버렸지만, 카인은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룡이 종언을 고하듯 길게 울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압도적인 에너지가 거대한 몸체에서 치솟았다. 이를 악물고, 카인은 마지막으로 온 하체에 힘을 싣고 하늘로 뛰었다. 햇빛처럼 내리쬐는 천공의 빛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주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던 강대한 적에게 최후의 공격을 내리꽂기 위해.
까마득한 옛날, 비룡을 타고 날아올랐을 때를 떠올렸다. 아직 기사가 되기 위한 기초 훈련도 시작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였지만, 하늘은 놀랄 만큼 시원하고 상쾌했다. 땅에 매인 인간과 달리 비룡은 높은 곳까지 날아도 추락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키지 않으면 땅에 착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카인은 영원히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간 쌓아온 죄들을 전부 털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높은 곳에서 자유롭게 달리기를 갈망했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충분히 오래 버틴다면, 어쩌면 기적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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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었다. 다시 딛고 일어서야 할 다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그 통증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하거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만.
기울어진 시야에 꽃들이 있었다. 이마 위에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으니 아마도 투구가 벗겨진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왜 불타는 듯한 통증이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전장의 경험으로 쌓아온 지식들이 하얗게 날아간 채로 그는 스스로에게 멍청한 질문을 반복했다. 그의 창은 어디 있는지. 왜 고통이 끝나지 않는지. 하늘을 달려야 할 다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몸을 일으키려 시도하자 또 한 번 몰려온 통증의 파도에 자신을 거의 놓쳐버릴 뻔했다. 그래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시야는 확보했다. 자신의 몸뚱이에 아직 멀쩡하게 붙어 있는 두 다리를 확인하고, 카인은 척추가 부러진 것을 알았다.
아쉐는 정화를 받았다. 무사히 돌아갔을 것이다. 그 사실에서 다시금 안식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실패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너무 심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지는 것은 왼손뿐이었다. 창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꽃밭에 삼켜져 보이지 않았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잡히는 것은 꽃과 흙뿐이었다. 그를 고통에서 구원해줄 단도를 찾았지만, 그 자리에 없었다. 단도는 시련의 산에 떨어뜨리고 온 그대로, 아마도 오래 전에 산과 함께 어둠 속에 삼켜졌을 것이다. 한 손만 남은 몸뚱이로 카인은 마비된 몸을 끌고 나아가려 했다. 움직이려 할 때마다 고통의 전류가 그를 끝없이 강타했다. 땅을 긁고 흙을 파내며 풀뿌리가 뜯겨져나갔지만, 곧 자신이 전혀 전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눈물로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외로웠다. 무서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카인은 끊어지기 직전 간신히 붙어 있는 생명줄에 무의미하게 매달렸다. 누군가 고통을 멈춰주길 바랐다. 지그나타스에서 그의 몸을 안에서부터 갉아먹던 검은 괴물을 정화하고 상처를 치유한 힘을 떠올렸다. 로자의 치유 마법과 닮은 하얗고 찬란하고 강대한 힘을. 다시 한 번 그 때의 기적이 자신에게 와 닿기를 빌었다.
기적을 기대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명령을 받아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라면, 스스로에게 같은 방식의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었다. 그것이 바론의 용기사로 일평생을 살아오며 뼛속 깊이 새겼던 진실이다. 예전이라면 더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세계에서 수 번을 죽고 되살아나면서, 필요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면서 한 번도 후회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과연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일까, 매번 되뇌이며 마침내 찾아올 안식을 기다렸다. 어쩌면 만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거짓된 죽음들을 그리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약해졌다. 아무리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겨도 지치지 않고 그를 비춰오는 햇빛이 너무나도 밝아서, 어느 새 빛에 적응해버렸다. 잊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은 명예도, 긍지도 없이 실패뿐인 채로 찾아오리라는 것을, 시련도 이겨내지 못하고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게 잃어버리고서도 끝까지 어리석었다.
몸 주위에 검붉게 젖어드는 풀들 사이로 홀로 수수하게 피어난 하얀 꽃송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고통 속에 흙을 잔뜩 파헤친 자리 너머로 왼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핀의 반란군에서 싸워온 청년이 언젠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 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리...."
언제부턴가 희망은 서서히 그를 침식해 약하게 만들었다. 희망은 곧 저주였다. 그의 마지막 죄값이었다. 영광 가득한 미래를 믿은 죄. 원해선 안 될 사람을 원한 죄. 벗을 상처입힌 죄. 친구들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친 죄. 결국 그 벗을 절벽에서 밀어뜨려 죽인 죄. 또다시 분수에 맞지 않는 구원을 갈구했던 죄. 카인은 단 한 번 자신을 구원했던 얼굴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살, 고 싶..."
죽음을 가벼이 여긴 대가로 주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도, 그리운 얼굴도, 아무도 그를 인도하러 오지 않았다. 프리오닐, 세실, 로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려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그들도, 바론 성의 높은 하늘도 없었다. 무서웠다. 만개한 노란 물결 위에서 버르적대며 차라리 빨리 끝나길 갈구했지만 인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신룡은 자비를 줄 수 없었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고 감각들이 물에 잠긴 듯 무뎌지는 동안 그는 압도적인 고독감에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이 고통이 어서 끝나길 빌었고, 이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끝없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